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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정복한 부여 기마민족 백제.

松隱 유수(종). 2021. 8. 5. 16:53

(사진)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사학자.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 1910-1996)>

 

그녀는 미국 오벌린대학을 나왔다.

1941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서구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15세기 일본 선화가(禪畵家) 셋슈(雪舟)의 낙관이 있는 수묵화 연구’로

일본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교토 대덕사(大德寺) 진주암에서 오랜동안 불교 선미술을 연구했으며

1959년부터 1978년까지 리버사이드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하와이 주립대학에서 동양미술사를 가르쳤다.

 

일본문화를 연구하면서

그 근원으로 알게된 한국문화에 대하여

심도있는 연구를 위해 1978-1986년 9년 동안 한국에 머물며 연구에 몰두하여

한.일 고대사, 한국미술, 불교, 도자기 등에 대한 1천여편이 넘는 칼럼을 썼고

‘한국문화가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조선호텔 70년사’ , ‘한국문화의 뿌리’  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영문저작을 냈다.

 

일본문화와 미술에 관해서도 16권의 저작이 있으나,

‘대덕사의 선(禪)’, ‘일본 선정원 연구’ ‘잇뀨(一休)선사 연구’ 등,

모두 한국문화가 원류로 된 논문이었다.

 

그녀의 책,

‘한국이 일본문화에 준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1984, 한림출판사)’

 

(사진) 한성(위래성) 백제는 왜의 규슈지역과 요서지역, 산동지역 및 남중국해 여러 섬을 경영했다.  

 

<부여 기마민족의 자취>

"어느 나라나 그 역사초기에 등장하는 중요한 지역이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은 이민자들이 처음 미국땅에 발디딘

플리머스록, 제임스타운, 센트 오거스틴 같은 곳이다.

 

일본의 경우도 역사의 시작 단계 때 결정적인 곳인

'이즈모대사(出雲大社)',

'이세신궁(伊勢神宮)',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이 있다.

 

이곳은 관광 장소가 아니라 일본 신도(神道)신앙으로 닦여진 일종의 성소같은 곳이다.
수백만 일본인들은 해마다 해의 여신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의 '이세신궁(伊勢神宮)'를 방문한다.

이슬람교도들이 적어도 일생에 한번 이상 메카를 성지순례차 오는 것과 같다.

 

이슬람교도들이 메카에 와서는 아라비아가 그 옛날 받들던

카바신전의 검은 돌 주위를 여러번 맴도는 것과 같이,

'이세신궁'에 온 일본인들은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의 놋거울(銅鏡)이 있는

목조건물로 가려 놓은 두꺼운 장막앞에 대고 절한다.

아마데라스는 일본 고대역사서(712년과 720년 편찬)에

지금 천황가계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신(神)의 근본이다.

'이즈모대사(出雲大社)'는 이보다 방문객이 덜하다.

이즈모는 2,000여년전 신라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정착했던 곳이다.

이곳 신사에 모신 '바람의 신' 스사노오노는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의 오빠라는 신(神)이다.

즉, 자신들의 무지를 깨우치게 해 준 바람처럼 나타난 도래인

신라인들을 신(神)으로 모시는 곳이다.

세 번째는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이다.

이곳을 ‘부여 바위 신 신사' 라고도 한다.

왜(일본)가 처음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이룬 '아스카 문명'의 심장부 기차역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의 가까운 언덕숲 속에 위치한다.

백제 부여왕족 혈통의 여걸 왕녀 "신공(神功)"이 이끈 일단의 기마족들이

배를 타고 이곳 왜(일본)로 건너와 선진문명과 선진기술을 전파해 준 곳이다.


많은 일본인들이 적어도 일생에 한번은

이곳 '이세신궁(伊勢神宮)'를 참배하는 것이 애국적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곳에 보관돼 있다는 '아마데라스의 놋거울(銅鏡)'은

오직 '아마데라스'의 후예 왕위(천황)에 오른 지배자만이 볼 수 있는 신물이라 한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이즈모신사(出雲大社)'가 '이세신궁(伊勢神宮)'보다

더 오래된 역시가 담겨 있는 곳으로,

석기시대부터 진보된 문명을 가지고 이곳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은

주로 한국의 신라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는 일본 고대사에 잘 알려진 곳이지만

'이세신궁(伊勢神宮)'에 비하면 방문객은 많지 않다.

여기 보관돼 있는 칼(칠지도)은 스사노오노가 용의 머리를 베었다는 칼도 아니고

해의 여신(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이 진무에게 ‘일본땅을 정벌하라’며 내려 준 칼도 아니다.

그것은 무속적인 형태의 '칠지도(七支刀)'라는 칼이다.

 

'칠지도(七支刀)'는 바로 실체적 ‘왜(알본)정벌을 입증해 주는 유물'로서

이 칼은 백제 22담로 중, 큰 7담로에 만 하사한 것으로서

서기 369년에 해당하는 년대의 한문 금글자가 새겨져 있다.

 

서기 369년에 왜(일본)에서는 한문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백제에서도 오직 최고의 지식인 만이

당시 극동의 유일한 기록문자이던 한문을 읽고 썼을 뿐이다.

 

'칠지도(七支刀)'는 "신공(神功;진고왕후)"이라는 이름의

젊고 아름다운 백제 부여왕녀가 이끌었던 기마족 일단이

서기369년 한국 백제에서 건너와 일본을 정벌 통치했음을 확증시키는 자료다.

그런데 일본은 오히려 '백제 기마족들에 의한 왜 정벌을 감추어 보려는 시도' 가

후일 8세기 동안 일본 역사에서 행해져 왔으나,

이들은 "진고왕후(神功)"가 한국을 정벌한 여걸이라고 거꾸로 묘사했다.

 

너무나도 극적이고 기발하고 대담한 역사외곡의 이 시도는,

진고왕후(神功)를 백제 부여왕녀가 아닌 순수 일본인으로 설정하고

한국에서 일본을 정벌한 사실을 180도 뒤집어서

진고왕후(神功)가 한국 남부 가야, 신라, 백제을 점령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창조해 낸 것이었다.

오늘날 일본인 중에는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 깊숙이 비장되어 있는,

기묘한 형태의 칼 '칠지도(七支刀)'의 본질을 바로 알거나

백제 부여족의 이야기를 들어 알거나

이 칼이 백제 부여 지배자들의 성물 중의 성물로 성스러운 바위를 받드는 신사,

'석상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옳바르게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들은 '이세신궁(伊勢神宮)'의 ‘고 조선의 놋거울(銅鏡)’이

실은 오래 전에 (고의로) 망실되었음을 들어 본 적도 거의 없고,

여기 이 놋거울(銅鏡)에서 밝혀지는 사실은 상상조차도 해 본적이 없을 것이다.

 

(사진) 신석기-청동기시대 '쌀 재배 농사기술'을 가지고 온 <신라인>을 모시는 신궁이다.

신(神)들의 고향(故鄕) '이즈모대사(出雲大社') 신궁.

 

(사진) 백제 철기문화(七支刀)를 하사받은 왜(일본)인들의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

 - 백제의 철기문화 하사받은 7담로(七邑城) 상징 칠지도(七支刀)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신궁.

 

(사진)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봉안하고 있는 철기문화 백재 7담로(七擔魯)의 징표.

- 기원후 369년 백제로 부터 하사받은 왜의 <칠지도(七支刀)>

 

(사진) "이세신궁(伊勢神宮)" - 세로운 문물을 전해 준 백제도래인을 모시는 신궁.

 

"본인이 이 책 ‘한국이 일본문화에 준 영향; 일본의 숨겨진 역사(1984, 한림출판사)’를

처음 구상한 것은 1930년대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연구할 때 였다.

이후 일본 교토, 하와이, 그리고 최근 서울 체재까지 40여 년 동안 자료가 모이고 사실이 구체화되었다.

마침내 이 모든 것을 가지고 1,500년 이상 한국과 한국인이

일본과 그 문화에 끼친 엄청난 영향의 중요성을 밝힌 내용을 빙산의 일각이나마

우선 책으로 내기에 이르렀다."

중앙아시아 및 북아시아에서 기마유목민족은

수없이 여러번 동북아 역사의 변환을 불러온 막강한 힘으로 작용했다.

여러 부족이 함께 어울려 대집단을 형성하고

강력한 지도자를 따라 좀더 살기 좋은 평원지대로 이주하고

때로는 지나(중국)와 인도의 부패왕조를 전복시키고

북극아래 시베리아지방, 춥지반도, 캄차카부터 남으로 만주까지를 휩쓸었다.

요새를 불태우고 남녀포로와 약탈한 전리품들을 챙겨 떠났다.

 

인도의 힌두쿠시산맥도 지나(중국)의 만리장성도 이들을 막지 못했다.
기마유목국가들은 역사상으로는 짧은 기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후세까지 서구 연구자들에게 잘 알려진

카니슈카, 훈족(흉노족)의 아틸라, 징기스칸, 타머레인, 호랑이 바부르 등의 존재와

스키티아(훈족), 타타르, 투르크(돌궐), 몽골과 만주족들이 정복자 부족으로 이름을 떨쳤다.

동북아 초원지대의 잔혹한 기마민족 조선족(동이족)들은

지나(중국)와 인도, 유럽의 거주민들까지 짓밟고 정복했다.

서력기원이 열릴 무렵 지금 한국(북위 38선 이하)이라 불리우는 나라의 남반부에는

농사와 수렵 어업 등으로 살아가는 여러 부족들이 서로 느슨한 연대를 맺고 있었고

이중에는 대마도해협을 건너 왜와의 해상교역에 나선 부족도 있었다.

이때까지도 왜와는 강력한 왕국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거리상 멀리 떨어지고 척박한 지역의 한반도에서

후일 삼한이라고 지칭하게 된 부족들이 생겼다.

오늘날 한반도를 양분하는 38선 이북에는 역시 알타이 계통어를 쓰는 기마종족들이 살면서

영토와 지배권을 두고 내부 분란과 함께 사나운 이웃들과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한 나라는 한때 대동강유역에 낙랑이라 불리는 소규모 관리구역을 설정했다 한다

(역자주; 이당시 코벨은 한사군이 요서에 있었다는 설을 접하지 못하고

대동강 유역이라는 과거의 통설을 차용했다).

그들 사나운 기마족들은 두 번 휜 활을 무기로 다루며 기마전술에 능하고

용맹무쌍하기 이를데 없는 기질로 미개한 문명을 모두 정복했다.

4세기에 고구려가 한사군을 정복함으로서 한 나라가 심었던 식민지는 사라졌다.

이때의 고구려는 역사가 기록하는대로 북부여족의 일파였다.

고구려는 한반도내 여러 기마족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고구려는 북부여의 남진을 차단함으로서

지금은 동부여란 이름으로 알려진 일파를 동해구석으로 몰아넣었다.

북부여에서 떨어져 나온 동부여는

한반도 남쪽으로 계속 남하하여 원주부족들과 합류하고

이후 가라(加羅)와 신라(新羅)로 태어날 기반을 형성했다.

부여왕국은 옥황상제의 자손이 세운 국가라고 건국설화가 전한다.

부여의 통치자는 부족 전체의 행 불행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무속적 신앙의 지배자였다.

흑룡강(아무르)과 압록강 사이 비옥한 만주벌판 초원지대에 자리잡은 북부여는

여러 차례 기마유목민족의 외침과 내부의 반란을 겪었다.

4세기 초에는 만주의 산림 속에서 쏟아져 들어온 선비족의 침입을 받았다.

한 나라도 어지러운 내정으로 인해

그들이 ‘선진화된 동이’로 인정하던 부여를 도울 힘이 없었다.

이로써 북부여가 망하자 주요인물을 포함한 난민들은 한반도로 남하해 들어왔다.

이들 방랑부여족(Volkerwanderungen)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그로부터 4백년 후에나 쓰여진다;

이미 그들의 기마족 조상으로부터 멀어진 일본이라는 땅에 둥지를 튼 자손들에 의해

단편적으로 축적된 이야기를 통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부여기마족들은 그 시대에 신무기 철로 제작한 칼과 갑옷을 장착하고,

전쟁에 임하여는 무당의 긴 사설을 듣곤 했을 것이다.

그들 이야기는 ‘바바리안 코난’ 과 잘 들어맞는다.

보다 나은 땅을 찾던 군사강국의 부여족은 한반도에 삼국시대를 열고

이어서 일본 야마도 평원을 정복한 ‘바위의 후손들’(Children of the Rock)이었다."

 

<존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사진) <존 카터 코벨> 여사 이론에 근거한 백제 기마철기민족이 경영한

해외 백제22담로(海外百濟22郡縣)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