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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상징 <씨름(高麗伎)>

松隱 유수(종). 2021. 11. 23. 10:56

씨름을 지나(China)에서는 <고려기(高麗伎)>라고 했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산양처럼 겨루기를 익혀야 했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 겨루기 흔적이 남아 있다.

고대 그리스벽화에서 씨름과 유사한 형태가 묘사되어 있기도 하고,

석가모니도 왕자신분 시절 사촌 '제바달다'와 겨루기를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부여조(夫餘條)>에서

“은(殷) 정월에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한다.

이때가 되면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즐긴다.

이를 영고(迎鼓)라고 한다.

이 기간에는 형옥(刑獄)을 다스리지 않고 죄수를 석방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고(迎鼓)는 동이족의 나라 은, 상 및 고대조선, 대부여, 고구려 등,

고대조선 사람들이 각처에서 모여서

씨름(角觝), 기마(乘馬), 궁술(弓射), 수박(手搏), 격구(擊毬) 등

겨루기를 홍익인간 이념으로 펼쳐

만방(八方)의 제후국 군장(고추가)들에게 관람시키고

승리자에게 벼슬을 내렸다.

고추가(군장)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다시 2차 영고(迎鼓)를 실시하여 <고대조선>의 전통 풍속을 이어갔다.

 

<수서(隋書) 백제전>에서도 이 풍속은,

"투호, 바둑, 농주(弄珠) 등의 유희가 행해졌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사람들은 '축국'을 ‘농주지희(弄珠之戱)’라고 불렀다고 한다.

백제에서 즐긴 '농주'가 '축국(축구)'일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그 보다는 두 손으로 공을 여러 개 공중으로 던지고 받는 형태의 경기였다.

즉 '농주'는 ‘농환(弄丸)’이라고도 하는데 '죽방울받기' 기예(技藝)로 보인다.

 

<삼국사기> 〈악지(樂志)〉에 수록된 최치원이 쓴

5개의 시(詩)인 향악잡영오기(鄕樂雜詠五伎) 가운데 하나인 금환(金丸)이 곧 농환이다.

 

이와 같이 고대조선 사람들은 멀리 중앙아시아까지 흩어져 살다가,

<영고(迎鼓;은정월대보름)> 나 <동맹(東盟;시월상달)>이 되면 모두 한곳에 모여,

하늘에 제사(天祭)를 지내고

여러 날을 서로 웃고, 떠들고, 춤추고, 술마시고, 즐기고, 노는 잔치를 펼치고,

민족의 단합과 풍속, 문물을 개발촉진, 전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한 예로 주몽이 왕위에 오르기 전 계루부 군장으로 있을 때,

8부족 군장 고추가(古鄒加)들이 동맹(東盟)날 모여 겨루기를 관람시켰는데,

그 종목이 각저(씨름), 궁사(궁술), 마술(기마), 수박타(택견) 겨루기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겨루기 중에서도 '씨름(角觝)'이 가장 인기높은 종목인 듯 하다.

 

지나(China) 섬시성 서안(장안) 남쪽의 객성장(客省莊) 41호분을

1957년 한무제(漢武帝;BC 140년)의 것으로 판단하고 무덤을 발굴했는데,

그 무덤은 한무제가 있기 이전 BC 2,000년 경 고대조선 적석총으로 판단되었다.

당시 크게 당황한 중국공산당 정부는 그 흔적을 다시 뭍고 지금까지 밝히지 않고 은폐하고 있다.

지나 중원의 서안(장안), 함양 근방에는

고대조선 적석총으로 추정되는 피라밋 수십기가 지금까지 은폐되어 있다.

 

이 고대조선 적석총에서 당시 출토된 <투조동식(透彫銅飾) 씨름 판화 요대(腰帶)>는

지금의 과학기술에서도 쉽지 않는 동판부식방법으로 만든 허리띠였다.

<동판부식 씨름판화 요대>는 길이 13.8cm, 폭 7.1cm의 장방형이다.

 

고대조선 <동판부식 씨름판화 요대>에는 양 옆의 나무에 당나귀가 한 마리씩 매어져 있고

그 사이에서 두 사람이 맞붙어 씨름하고 있는 고구려 씨름총(角觝塚) 그림과 거의 같다.

인물은 코가 크고 장발로서 서역 흉노족(훈족,스키타이족)사람으로 보이는데,

서로 상대방의 한쪽 다리와 허리춤을 움켜잡고 힘을 겨루고 있다.

마치 나무에 매어 둔 나귀를 걸고 씨름판을 벌린 것 같아 보인다.

씨름꾼의 머리 위에서 새 한 마리가 입을 벌리고 날갯짓을 하는 모습은 응원을 하는 듯 하다.

이는 고구려 각저총 벽화와 거의 동일하다.

 

(사진) 중원 서안(장안),함양의 고대조선 적석총 출토 - BC 2,000년 경 <동판부식 씨름판화 요대>

- 훈족(흉노족;스키타이족)과 한겨레로서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이다.

- 고로 훈족(스키타이족)은 한민족과 동일한 고대조선(환국+배달국+조선) 한겨레었던 것이다.

혹?  당나귀 한마리씩 걸고 씨름하는 것은 아닐까?

*(자료)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이형구.

 

특히 지나문헌에는 고대조선의 씨름을

"고려기(高麗技) 또는 요교(撩骹)"라고 했을 정도로

지나(China)씨름 ‘쑤와이 지아오(摔跤)와

지평(Japan)씨름 스모(相撲)와는 그 방식이 다르고 독특하였다.

 

옛 고구려의 도읍지인 만주의 통구 부근에서 발견된 이 고분벽화에는

두 사람이 상대의 허리띠를 잡고 씨름을 하는 광경이

지금의 천하장사 시름판과 같이 보인다.

씨름판에는 심판으로 보이는 사람과 나귀, 곰, 범, 새 등 각종 동물들도 보인다.

 

(사진) 한겨레 고구려 각저총(씨름총) 고분벽화

- 훈족(흉노족;스키타이족)이 한민족 영고에 참가하여 씨름을 벌리고 있다.

- 이것은 훈족(스키타이족)은 한민족과 동일한 고대조선 사람로서 한겨레었던 것이다.

 

고대조선(환인칸국+환웅배달국+단군조선)시대 '동명'과 '영고' 날에는

각처에 살던 부족 대표들과 추장(고추가)들이 모여

천제(天祭)를 올리고

고유민속놀이 '씨름', '연등', '격구', '마술'등 여러종류의 겨루기와 놀이를 하고

자신들의 고향(나라)으로 돌아가 똑 같은 경기와 놀이를 2차로 열어

고대조선의 배달민족 한겨레임을 서로 알렸다고 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각저총 씨름장면이나,

중원 서안(장안),함양의 고조선 적석총 출토 

BC 2,000년 경 <동판부식 씨름판화 요대>를 보아

고대조선(환국+배달국+조선) 영지가 동북아시아 전 지역임을 전파하고

은정월 보름과 시월상달에 함께 모여 동족임을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정인지 등이 편찬한 <고려사>에는 씨름과 관련된 첫 문헌상의 기록이 있으며,

충혜왕이 나랏일을 등한시하고 매일 내시와 오락용 씨름인 "각력희(角力戲)를 즐겼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오락용, 군사 선발용 등의 다양한 씨름이 존재하였고,

씨름을 잘하는 군사를 용사라 칭하기도 하였다.

 

조선 세종 때 상왕과 왕이 배에서 군사들의 씨름 경기를 관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6~17세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군사훈련이 강조되었고,

씨름은 국가가 장려하는 무예 수련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시대의 양상이 달라지면서 씨름은 세시 풍속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6세기에는 단오의 풍속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조선 후기에는 농사 의례와 결합하여

단오 외에도 정월, 칠석, 백중, 추석이 행하여졌다.

 

18세기에는 씨름에 샅바가 출현하며

각희(脚戱)라고 불리는 다리 기술이 주축이 되고,

현재와 비슷한 형태의 씨름으로 발달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김홍도와 심윤복의 그림에도 반영되었다.

 

<세계무예선수권대회>에서 <크라쉬(kurash)>라는 종목이 있다.

<크라쉬> 뜻은 ‘경쟁하다’ ‘시합하다’ ‘싸우다’ 라는 의미이다.

 

BC 3,000년부터 <단군>을 국조로 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유래된 전통 씨름도 있다.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로도토스'가 쓴 유명한 역사서에서

"<크라쉬>는 '우즈베키스탄'의 국민들의 삶에서 행해졌던 대중스포츠다." 라고

기록한 것을 볼때,

결국 씨름(크라쉬)가 고대조선의 단군조선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어떤 학자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씨름하는 모습이

<크라쉬>하는 중앙아시아 사람이라는 주장도 한다.

 

1940년 집안 통구 고구려 고분의 전실 북쪽 벽면에

백희기락도(百戱伎樂圖) 왼쪽 위 모서리에 씨름 그림이 있다.

두 사람이 씨름을 하는데 머리에 상투를 묶고 거의 알몸 상태이다.

이들은 서로 머리를 상대방의 왼쪽 어깨에 엇갈리게 붙이고

오른팔은 상대방의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쑤셔 넣은 채

두 손은 상대방의 샅바(씨름 띠)를 움켜쥐고

왼쪽 다리를 뻗어 배지기 기술을 쓰고 있다.

씨름하는 고구려 벽화의 모습이 어쩌면 오늘날의 민속씨름과 똑 같을까?

 

(그림) 한겨레 고구려 고분벽화 장천제1호 (씨름)

 

한민족 한겨레의 풍습에서 단오(端午)는 한민족 5대명절의 하나다.

단오절은 온 나라가 마을마다 모여서 씨름을 비롯해 그내타기,널 뛰기, 자치기, 제기차기

각종 놀이를 하는 즐겁고 행복한 날 이었다.

단오는 수릿날, 천중절(天中節)이라고도 한다.
아녀자와 소녀들은 창포탕에 머리를 감고 그네뛰기 널뛰기를 즐긴다.

그러나 단오날에 빼놓을 수 없는 놀이는 뭐니뭐니 해도 장정들의 씨름이다.


조선 중기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志)』와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

5월 단오날 풍속은 임금님이 부채를 신하나 궁인들에게 나눠 주어

여름철의 더위를 쫓도록 하고 사자발 쑥(艾虎)으로 만든 호랑이를

내각의 대신(閣臣)들에게 나눠 주어 악귀를 물리치게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임금님의 행을 본받아 각 가문에서도 최고 어른이 아랫사람들 및 종에게 까지

배풀음을 실천하는 홍익인간 이념을 넓이 행한 것인가?

 

(그림) 김홍도의 한겨레 단오 풍속도.

 

(그림) 한겨레의 단오 씨름풍속도.

(사진) 근대 천하장사 씨름 풍속도.

 

 

<미안합니다><고맙습니다><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