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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松隱 유수(종). 2021. 12. 10. 14:59

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다.

역사기록이 강해야만 민족이 강해진다.

고대역사가 강해야만 미래 역사도 강해진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는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된

신체호의 <조선사(朝鮮史)>를 말하는 것인데,

이 <조선사>는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 기록된 책이 였으나,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 부분만 연재되고 끝났기 때문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1948년 해방 후 <종로서원>에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로 그 연재된 부분 만을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사진) 신채호(申采浩 ; 1,880~1,936) - 독립운동가(순국선열), 충남 대덕 출신.

 

(사진) 신채호 선생 묘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사진) 신채호 동상 - 서울대공원 입구.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상고사>는 전 1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편 총론,

2편 수두시대,

3편 고대3조선 연맹시대,

4편 열국쟁웅시대(列國爭雄時代) 대(對) 한족 격전시대,

5편 (1) 고구려 전성시대,

       (2) 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6편 고구려·백제 양국의 충돌,

7편 남방제국 대 고구려 공수동맹,

8편 삼국 혈전의 시작(始),

9편 고구려 대전 수나라(對隋戰役),

10편 고구려 대전 당나라(對唐戰役),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반 민족국가.

 

(사진) 신채호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상고사> .

 

그 내용은

제1편 총론에는 신채호의 역사이론이 전개되어 있다.

그는 ‘나(我)와 남(非我)의 투쟁으로서의 역사’를 파악하고 있다.

즉, 그는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사물의 모순·상극(相克) 관계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이러한 투쟁 관계가 역사로서 채취되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상속성과 공간적인 보편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총론에서는 역사학연구의 방법론도 제시되어 있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선택·수집·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실증(고고학)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이념과 방법을 제시하면서,

신채호는 과거의 사대주의적 이념에 입각해 한국사를 서술한 유학자들과

당시 식민사상 역사가들을 비판하였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종래의 사대식민적 한국사의 인식체계에서

새로운 넓은 인식체계를 수립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종래의 단군·기자·삼한·삼국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실학시대 이종휘(李種徽)의 <동사(東史)>에서 영향을 받은 듯,

대단군조선(고대3조선)·대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대단군3조선의 불조선·신조선·맑조선 설은 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을 주장하고

삼한의 이동설을 제시한 것은 옳바른 고대사 연구에 큰 자극을 주었다.

 

둘째, 이러한 역사체계에 부수되는 것으로

상고시대 한국사의 웅대한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는데,

상고사의 대단군3조선 시대의 역사무대가

지나대륙의 서안, 함양 및 황하평양, 하북성 지역과

요서(遼西)지역 및 산둥(山東), 장강지역을 경영했다고 발표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나 그 뒤의 대부분의 역사책들이

한국고대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를 삼국시대 이후로 보았고,

그 무대 또한 한반도와 일부만주에 국한시키는 잘못된 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식민주의 사관론자들도 한국사의 타율성론(他律性論)을 강조해,

한국사의 전개 무대를 한반도 내로 축소시키고 있었다.

 

신채호는 이와 같은 종래의 주장들에 단연코 반대하고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가 고조선(환국,배달국,조선)이고,

그 활동무대도 북으로 북만주,

서남쪽으로 요서(遼西)·발해만 유역.

직예성(直隶省)·산둥·산서(陜西省;황하 중부) 유역.

회하(淮河)·장강(長江) 유역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종래의 한사군의 한반도내 존재설도 잘못됨을 밝히고,

"한사군이 실재하지 않았거나

요서(遼水 西; 난하 서) 지역에 존치(存置)되었다고 밝혔다.

 

셋째,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중시하나

신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역사를 투쟁의 기록으로 파악한 '단재사관'에서 한민족에서 볼 때,

고구려는 외세로부터 한민족을 보호하고,

대외투쟁으로 승리를 거둔 민족적 국가였으나,

신라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가 서기전 37년부터 서기 668년까지 705년간 존속한 나라로 되어 있으나,

신채호는 고구려 900년 설을 내세우면서

앞부분 200여 년이 삭감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신채호는 한 무제와 대결한 세력은

위만조선이 아니라 고구려 라고 주장하였다.

 

백제는 대부여와 고구려에서 파생된 나라로서,

고구려와 같이 대외경략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고 신체호는 기슬하였다.

즉, 근구수왕(근초고왕)과 동성왕 때

지나대륙의 요서, 진평 2지방과 산둥지방 및 일본 전역을 식민지로 삼았고,

해외 22담로(22군현)을 설치한 서남해양대제국을 형성했다고 고증했다.

 

또한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 본토가 망하자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백제의 부흥운동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고구려, 백제에 비해서

신라는 외세(일본, 중국)과는 투쟁을 거의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삼국통일의 경우 당(唐)세력을 끌어 들였고,

그 결과 고조선 및 고구려의 옛 방대한 영토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채호는 신라의 삼국통일은

민족사에 긍정적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사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김유신(金庾信)의 반 민족주의를 비판하였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는 종래의 우리나라 고대사 인식을

고고학적 실증의 측면에서 바라 볼 수 있는 진취적 객관적 방향을 제시한 점이

정당한 사관(史觀)이라 할 수 있다.

 

<신채호 역사관>은 민족주의 의식을 강조하긴 했으나,

고려-조선의 사대유교사회를 거쳐 오면서

지나(China)인문학에 뭍혀서 잊어버린 한민족 고대사를 되찾는데 큰 의의로 평가해야 한다.

 

따라서 <고기(桓檀古記)>에서와 같이

이 책의 내용도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만 취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필자도 <신채호 역사관> 눈으로 <한민족문명>을 다시 살피니,

고조선(환인환국+환웅배달국+단군조선)의 처음 아사달(서울)이 장안, 함양 이었고,

1차 천도 아사달(서울)도 황하평양(弓房)이었다는 것, 

명도전(明刀錢)이 연나라 돈이 아니고 단군조선 <돈> 이었다는 것,

단군조선의 국경 "패수" 즉, "열수(列陽)"가

청하(靑河)의 지류 <호타하>라는 것이 내 눈속에 속속들어오니

이 얼마나 기쁜지 형용할 길이 없었다.

 

https://youtu.be/VkDNk3Ld5S8?si=TJcBeGrvhoZ4qlzQ

 

 

(사진) 신채호가 쓴  의열단(義烈團)의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1923년 1월 <의열단(義烈團)>의 독립운동이념과 목적을 이론화하여 천명한 선언서이다.

<의열단>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후 일제를 피해

만주 길림성(吉林省)으로 피한 김원봉(金元鳳) 등 조선독립운동가 13명이

그해 11월에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로서

암살·파괴·폭동 등을 중요한 독립운동 목적으로 채택하였다.

 

(사진) 김원봉(金元鳳 ; 1,898~1,958) - 좌익 독립운동가, 경남 밀양 출신.

 

 

의열단장 김원봉은 해방 후 고향 밀양으로 돌아 왔으나

군정시대 장택상 및 친일경찰들에 의해 좌익으로 체포구금 당 하다가

친일 앞잡이를 청산한 북한으로 넘어가 김일성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오파괴(五破壞)’ 대상으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

매일신보사.

경찰서.

왜적의 중요기관 등 이다.

 

암살의 ‘칠가살(七可殺)’ 대상으로

조선총독과 총독부고관.

일본군부 수뇌.

대만총독·

매국노 5적.

친일파 거두·

친일경찰 밀정(敵探).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 이다.

 

<의열단>은 1920년부터 큰 성과를 보이기 시작하지만,

그들의 활동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이념의 정립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즉 <의열단>의 폭력적 독립운동에 대해 비판과 비난이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열단>은 독립운동의 이념과 목적을 정립하여야 만 했다.

<의열단>이 신채호에게 <조선혁명선언문>을 부탁한 것도 여기에 있었다.

 

1910년 4월 망명길에 오른 신채호는

1919년 임시의정원에 참여하면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부터는 반(反)임시정부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민대표회의의 개최가 확정된 뒤

1922년 12월 신채호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상해(上海) 폭탄제조소를 시찰하고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문> 요청에 응 한다.

 

이 때 김원봉은 이론가이며 의열단원인 무정부주의자

유자명(柳子明)을 신채호에게 합숙시켜 선언문 작성에 이념적 뒷받침을 하도록 하였다.

 

이 선언문에 무정부주의 이념과 민족주의 이념이 혼재해 있는 것과,

선언문 집필 후에 신채호가 무정부주의로 감염된 것은 이 때문으르 보고있다.

 

그 내용은 1개월여의 준비 끝에 1923년 1월에 작성된 이 선언문은

5개 부분 6,400여 자로 되어 있다.

 

첫째, 일본을 조선의 국호와 정권과 생존을 박탈해 간 강도로 규정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적 폭거는 정당한 수단임을 천명하였다.

 

둘째,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대두된 자치론(自治論),

내정독립론(內政獨立論),

참정권론,

문화운동,

일제와 타협하려는 자들을 ‘적’으로 규정하였다.

 

셋째,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론,

독립전쟁준비론 등의 독립운동 방법과 작전을 비판하였다.

 

넷째, 일제를 몰아내는 혁명은 민중이 직접혁명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섯째, ‘조선혁명’과 관련, 다섯 가지 파괴와 다섯 가지 건설의 목표를 제시하였다.

 

‘5파괴’의 대상은

이족통치(異族統治).

특권계급·

경제약탈제도.

사회적 불평균.

노예적 문화사상이다.

 

‘5건설’의 목표는

유적 조선.

자유적 조선민족.

민중적 조선.

민중적 사회.

민중적 문화 라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은 폭력을 혁명의 수단으로 정당화하는 등, 무정부주의적인 요소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의열단원 뿐만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가들에게

한국의 전 민족구성원에게 독립에 대한 확신과 목표를 불어넣은 것은

이것많큼 없다고 할 정도로 귀중한 문서였다.  (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주석 조선상고사(註釋 朝鮮上古史)』 상·하(이만열 주석, 1983)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단재신채호전집,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1972·1977)

「단재신채호(丹齋申采浩)와 민족사관(民族史觀)」(『단재신채호선생탄신백주년기념논집』, 1980)

「단재신채호(丹齋申采浩)의 고대사인식시고(古代史認識試考)」(이만렬,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 15, 1978)

「조선사(朝鮮史)」(『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종로서원, 1948)

「조선사(朝鮮史)」(『조선일보(朝鮮日報)』, 1931년 6월 10일자부터 103회에 걸쳐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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