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한겨레문명><황칠(黃漆)>

松隱 유수(종). 2021. 12. 14. 15:09

황칠(黃漆)은 <한민족>만이 가지고 있던 화려한 황금칠 공예 도료(塗料)로서

한반도 남쪽 섬지방에서만 자라는 한국특산나무 황칠나무 수액으로 만든 것이다.

 

고대로 부터 <한민족문명>의 목공예, 지공예, 죽공예, 금속공예의 마감으로 황금칠 황칠은,

그 아름다움이 동북아시아 전 지역으로 퍼져나가

투명하게 빛나는 황금색 신물(黃金色 神物)을 힘 있는 자들은 소유하기를 염원했었다.

 

<황칠(黃漆)의 역사>

고대 황칠(黃漆)은 <한민족문명>의 우수성을 찾아 볼 수 있는 하나의 유물이다.

고조선(환인칸국+환웅배달국+단군조선)-부여-고구려와 삼국-발해와 신라-고려-조선까지

그 흔적을 찾아 본다.

 

한민족의 <고조선(칸국)> 환인께서

홍익인간(弘益人間) 인본주의 실천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실이 들불처럼 퍼져

당시의 유라시아대륙 팔방에서 부족들이 환인(桓因)의 품속으로 모여드니

그 영토가 서역 사라센과 중앙아시아까지 12칸국(桓國)을 형성했었다.

 

당시 12칸국의 부족장 고추가(古鄒加)들과 장수(將帥)들이 황칠 황금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가 햇빛을 받으면 눈이 부셔, 병사들이 처다보지도 못하고 항복했단다. 

 

BC 2,000~1,600년 <고조선(단군3조선)> 유물로 추정되는

<청동채화명문칠정(靑桐彩畵銘文漆鼎)>은,

화려하고 아름다워 BC 2,000년 경 유물로 믿기지 않지만

백부영 선생의 화학반응감정으로 그 년대가 확인된 봐 있다.

갑골문자 명문이 황칠 상감기법으로 세겨저 있는

<청동채화명문칠정>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이들 기물을 귀하게 싼 '비단보자기'에는 아직도 비단 흔적과 '명주실'이 남아 있고,

황칠의 황금색 글자는 황금처럼 빛나고 있었다.

 

(사진) BC 2,000~1,600년 경 <고조선(단군조선)>의 황칠/주칠 <청동채화명문칠정(靑銅彩畵銘文漆鼎)>

 

(사진) BC 2,000년 경 <고조선(단군조선)>의 상징, 황칠/주칠 삼발(三神)그릇.

 

(사진) BC 3,000년 경 하가점 하층 <고조선(단군조선)> 초기 유물, 황칠/옻칠 그릇.

 

고대 황칠 유물.

<한민족> 강역 <황칠 유물>은 다음과 같다.

 

(사진) BC5,000~4,500년 경 <고조선(황웅배달국)>시대 '황칠담긴 목기'(백제22담로 절강성 출토).

 

(사진) BC 2,000~1,600년 <고조선(단군조선)>시대 '황칠/주칠 그릇' - 산동성 대전자 고분 출토.

 

(사진) BC 1,600~1,046년 <고조선(단군조선)>시대 '황칠/옻칠 목기' 조각 - 하북성 출토.

 

BC 300년 경부터 서장(西藏)세력에 밀리기 시작한 <고조선(단군조선)>은  

BC 250년 경 중원일부를 통일한 진나라 시왕(始王)이

"옻칠천년 황칠만년"의 설화를 밑고

황칠나무를 '불로초' 라 여기고,

동남 동녀 각각 500명을 고조선(단군3조선) 맑조선(馬韓)에 공여물을 바치고

황칠나무를 얻어려 한반도 남부 및 제주도에 보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환인환+환웅배달국+단군조선) 및 부여 천자의 정통성을 이은 고구려 무사들은

당연히 황칠 황금갑옷으로 무장하고 전장에 나간 사실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진) 고구려 무사들이 황칠 황금갑옷을 입고 적을 물리치고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서기626년 백제 무왕이

당(唐)나라 황제가 탐내는 황칠갑옷 '금휴개(金髹鎧)'를 당나라에 보내서,

고구려를 견제해 줄것을 요구한 기록이 있다.

 

당나라는 백제에서 보내 준 그 갑옷을 입고

서기647년 고구려와 전쟁에 나섰다.

 

이때 기록에서

“백제가 금칠갑옷 '금휴개(金髹鎧)'를 보냈는데,

입은 갑옷의 광채가 하늘까지 빛났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당서(舊唐書)》 ‘백제’조에서

“백제 3개의 섬(島)이 있는데 그곳에서 황칠(黃漆)이 난다.

6월에 칼로 그어 수액을 채취하니 그 색이 황금색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당 나라 《통전(通典)》에서

“백제 서남 바다 가운데 세 섬에서 황칠수가 나는데 소하수(小夏樹)처럼 크다.

6월에 백류(白流)를 채취하여 기물(器物)에 칠하면

황금같이 번쩍번쩍 빛나서 안광을 빼앗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당나라가 백제의 황칠을 특별히 기록한 것은

당나라 및 다른 곳에서는 만들 수 없는 '백제특산물' 이었기 때문이다.

이 황칠 때문인지?

당 나라는 신라와 연합해서 백제를 먼져 멸망시켰다.

 

송(宋)의 유서(諭書)인 《책부원구(冊府元龜)》에는

“정관(貞觀)19년(서기 645년, 백제 의자왕 9년) 당 태종이,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금칠을 채취해서 산문갑(山文甲)에 칠 하였다.”는 내용도 나온다.

 

(사진) 서기645년 백제 황칠갑옷 '금휴개(金髹鎧)' 복원 투구

-벡제 공주 공산성 출토.

 

(사진) 서기645년 백제 옻칠 및 황칠 갑옷 '금휴개(金髹鎧)'의 복원

- 백제 공주 공산성 출토.

 

 

신라의 계림(鷄林) 북편

경주시 황남동123-2에서 최근 출토된 건물유적지 옆에

의도적으로 파묻어 놓은 지진구(地鎭具)가 출토 되었다.

 

서기 700년 경 신라경주는 지진을 억제하려고 묻은 지진구(地震具)에

황칠이 남아있다.

이는 황칠 덩어리는 신령한 힘을 가진 물질로 여겼음을 보여 주고 있는데,

황칠이 신라에서도 귀중하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북송의 손목(孫穆)이 지은《계림유사(鷄林類事)》에

‘칠은 황칠(漆曰黃漆)’이라 기록함으로써

당시 고려에서 ‘칠’이라면 어련히 ‘황칠’을 대표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계림지(鷄林志)》에서도

“고려의 황칠은 섬에서 난다.

6월에 수액을 채취하고 발라 볕에 쪼여 건조시키면 빛깔이 황금과 같다.

황칠은 본시 백제에서 나던 것인데,

지금의 절강(浙江) 사람들은 신라칠(新羅漆)이라 말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곧 《계림유사》의 황칠과 《계림지》의 황칠을 동일 물질로 본 것으로

일반적인 옻칠과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하였고,

황칠은 한반도 어디서나 채취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제주도 등 섬지방의 특산품임을 명기한 것이다.

 

(사진) 경주 신라집터 지진구(地鎭具)로 쓴 황칠 덩어리 - 경주 황남동 출토.

 

(사진) 가야의 황칠고대잔 및 황칠 붓

- 창원 다호리 출토.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기록하기를,

“황칠은 본래 백제에서 산출되었으나,

지금 절강 사람들은 황칠을 ‘신라칠’ 이라 한다.” 라고 했다.

 

황칠은 본래 백제에서만 산출되는 백제특산품이었다.

통일신라가 당나라와 황칠을 교역했고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황금색은 ‘황제’, ‘부귀’ ‘권력’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황칠 황금갑옷을 유난히 좋아했던 당나라는

신라에서 가장 탐내는 물건 가운데 하나가 황칠이었다.

따라서 당은 황칠을 공물로 더 많이 받치기를 요구했다.

 

서기1,276년 고려 중금지유(中禁指諭) 김부윤(金富允)이

원(元)나라에 갈때 황칠을 가지고 갔다.

서기1,282년에 좌랑(佐郞) 이행검(李行儉)이 원나라에 갈때 황칠을 가지고 갔다.

 

조선시대 명나라도 홍삼과 함께 황칠을 교역품 1등으로 꾸준히 선호했다..

그래서 황칠나무가 자생하던 제주도, 완도 및 남해안 섬지역 주민들에게

항상 무리한 채집이 요구되었다.

 

서기1,541년 조선 중종 36년에 간행된

<소,말,양,돼지 염역병치료방 언해(牛馬羊渚 染疫病治療方諺解)>에는,

“제주에서는 '나나니'를 황칠이라 하고, 북나무 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기 1,778년 정조2년 안정복(安鼎福) 쓴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도

"신라 진평왕 43년(서기621년)에 신라에서도 황칠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백제의 3섬에서 황칠이 나고

6월 나무껍질을 벗겨 진을 채취하면 빛이 금과 같다." 란 기록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서기1,794년 정조 18년 12월 25일 실록에서

호남위유사(湖南慰諭使) 서영보(徐榮輔)가 황칠에 대하여 상소를 올렸다.

“완도는 황칠이 생산되는 곳 입니다.

전라도의 감영, 병영, 수영 및 강진, 해안, 영암 등 3읍에서 모두 연례적으로 공물로 받치는데,

왕왕 무리하게 징수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근년 이래 나무의 산출은 점점 못한데 추가 징수량이 해마다 더 늘고 있습니다.

관청에 공납 할 즈음에는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 뇌물로 요구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일로 하여 공납을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한정 생산되는 특산품인 황칠을 지방관청에서 서로 더 많이 수거하려고 하다 보니

백성들은 공물 수탈을 피하고자 나무를 베어버리고 감춰버리니,

결국 제주도, 완도, 보길도 등에서

무성하게 자라던 황칠나무는 씨가 말라가고 있었다.

 

(사진) 근대조선 황칠 은그릇 .

 

(사진) 근대조선 황칠 한지고리(韓紙衣函)

- 전주한지박물관 소장.

 

(사진) 4국시대(고구려,신라,백제,가라) 황칠장농.

- 일본 정창원 소장.

 

(사진) 현대 황칠 마감 은그릇(銀食器) 공예품들.

 

다산 정약용의 시문집 《다산시선(茶山詩選)》에는

‘황칠(黃漆)’이란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공납으로 지정되어 해마다 실려 가는데,

징수하는 아전들의 농간을 막을 길 없어

지방민들이 이 나무를 악목(惡木)이라 이름하고,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네.”

 

이 시(詩)처럼 황칠은 공납품으로 백성들에게 지독한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그 공납을 피하려고 황칠나무를 몰래 베어버려 씨가 말리게 되었다.

 

고대 동아시아 최고의 도료이었던 황칠(黃漆)은

이로서 조선 후기에 그 맥이 단절되었다.

 

 

<옻칠천년, 황칠만년>

황칠(黃漆)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천연도료다.

황칠을 나무와 쇠에 칠하면 황금같이 아름답고 좀과 녹이 슬지 않고 열에도 강해

“옻칠 천년, 황칠 만년”이란 말이 나왔다.

 

황칠에는 안식향(安息香) 향기가 은은히 풍겨 나와서

지닌 사람의 신경을 안정시켜 주는데도 큰 효과가 있다.

황칠은 황칠나무의 진액(津液)으로 황칠나무에서 채취한다.

 

황칠나무는

쌍떡잎식물 산형화목 두릅나무과의 상록교목으로 높이 15m까지 자란다.

원산지가 한국남해섬 지방이고,

전라남북도, 경상남도, 제주도 등지 섬지방의 한국특산식물이다.

 

일본의 혼슈 남부, 오키나와에도 분포하고 있지만

수액의 색(황칠의 색)이 달라 칠로서 가치가 없다.

 

우기(雨期) 전후에 황칠나무 껍질을 칼로 그어

그 즙을 채취해서 도료로 사용하는데

색이 마치 황금과 같아서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한다.

 

황칠을 바르면 나뭇결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살고

가구는 한층 화사하게 치장하는 최상의 칠이다.

황칠의 효과를 더욱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밑바탕에 치자(山梔子)물을 들인 다음 황칠을 하기도 한다.

 

(사진) 완도 보길면 정자리 황칠나무(전남기념물 154호).

 

(사진) 황칠나무 잎과 열매.

 

(그림) 황칠나무 묘목.

 

 

황칠나무(Ivy tree)의 학명은 Dendropanax trifidus (Thunb.) Makino ex H.Hara이고,

두릅나무과(科)에 속하는 난대성 상록교목(常綠喬木)으로서

한국특산식물로서 그 분포지는 제주도, 완도, 보길도, 어청도, 진도, 홍도, 거문도, 보령의 연열도 등

주로 남부지방 해안 섬에서만 자생한다.

 

최근에는 건강식품으로 황칠차(黃漆茶)가 생산되는데,

그 효능은 정혈작용, 항암효과, 간세포보호효과, 항당뇨, 노화방지, 술해독, 황달에 좋다고 하나,

강한 독성이 있어 인체에 악 영향을 끼칠 수 있어 반드시 법제한 차를 마셔야 한다.

 

황칠나무에서 채취되는 수지도료(傳統樹脂塗料) 황칠은,

그 주성분 정유성분(精油成分)은

담황색(淡黃色)의 진한 유상액체(油狀液體)로서 상쾌한 향기를 지니며, 그 맛은 쓰다.

황칠정유의 고비점(高沸點) 부분이 주로 세스퀴테르펜(Sesqui-terpene)으로 구성하고 있으며,

그 밖에 알코올류, 에스테르류 등이 함유되어 있다.

황칠정유의 세스퀴테르펜은 D2=0.9215 ; ∩2=1,5052 ; α2=-0°87이라는 특정 수치를 지니며,

이중결합이 두 개가 있는 쌍환성(雙環性) 스퀴테르펜으로서

염화수소(鹽化水素) 화합물은 결정성(結晶性)을 만들지 않는다.

 

황칠을 칠할 때 사용하는 용제(熔劑)로는 알코올, 아세톤, 에스테르, 벤, 시너 등의 유기용매사용이 좋으며,

광택은 무광택으로서 내열성, 내습성에 침투력이 뛰어난다.

색상은 황금색이나 목재에 칠하면 무늬(木理)가 선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투명도가 약한 도료이다.

황칠을 칠한 후 건조시킬 때는 17∼23℃의 온도가 적합하며,

금속에 칠할 때는 금속에 열을 가하여 칠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건조시간은 약 4시간 정도로 한다.

 

황칠의 채취시기는 장마철이나 추운겨울 11월∼1월에는 피한다.

채취방법은 V자형 특수손칼로 황칠나무에 一자, V자, O자형으로 약간 깊이 골을 파 놓으면

그 골에 황칠이 고이게 된다.

채취시간이 많이 걸리고 채취량이 적어 황칠을 얻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림) 황칠 수액 나오는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