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가족들~
'안중근(安重根,1879년.9월.2일 ~ 1910년.3월.26일)' 의사는
대한제국 말기의 독립운동가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우는 등 인재양성에 힘 썼으며,
만주 하얼빈에서 동양평화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 처단하고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신 분이다.
해방 후 대한민국 최고훈장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사진) 안중근 의사(장군) 사진.
안중근의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 기운이 응감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 이름(兒名)을 응칠(應七)이라 불렀다.
어른이 되어 응칠(應七)을 자(字)로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진사를 지낸 '안태훈'이다.
할아버지는 진해현감을 지낸 '안인수'이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가업으로 쌀 장사를 하여 가난하지는 않았다.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청년기에는 말타기와 사냥에 능숙했으며
포수들 사이에서도 명사수로 알려졌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아버지 '안태훈'이 사병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가담하였으며,
서기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에 입교하여 신학문을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도 배웠고,
도마(Thomas, 多默)라는 세례명도 얻었다.
서기 1,904년 홀로 평양으로 가서 석탄상점을 경영하였으나,
이듬해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에 자극받아 상점을 팔고,
서기 1,906년 삼흥학교(三興學校, 후에 오학교로 개칭)를 세우고,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서기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 중장(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으로,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 방면으로 침투 왜적(倭敵)과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였다.
이후 노에프스키(烟秋)에서 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데 진력하였다.
이 이력으로 인하여 <안중근 장군>으로 호칭해야 한다는 여론도 높다.
서기 1,909년 동지 12명과 구국투쟁을 죽음으로써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였다.
서기1,909년 10월 동양평화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거사하기로 뜻을 같이하고
동지 조도선(曺道先)과 통역 유동하(劉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은,
서기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한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 플랫폼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고 있던
이토 희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 처단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주철도 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만주 여순(旅順)에 위치한 여순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1,910년 2월 14일 재판에서 졸속으로 사형이 선고되고
한달 후 1,910년 3월 26일 급히 형이 집행되었다.
안중근 장군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옥중에서 휘호한 많은 유묵(遺墨)이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서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서기 1,970년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471번지에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의사의 동상은
일제 식민 통치의 상징물,
남산 일제신궁(日帝神宮)이 있던 그 자리에 건립되었다.
(사진) 안중근 의사(장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남산 동상 - 이 자리는 일제강점기 일제신궁이 있던 그 자리다.
(사진) 안중근 의사(장군)의 '동의단지회' 기념비에서 촬영된 '북두칠성(응칠)'.
<안중근 장군의 어머니>
특별한 효심과 애국심의 '안중근' 의사와 그를 위대한 인물로 양육하신
그의 어머니 '조성녀(趙姓女) 마리아' 여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성녀 마리아" 여사는
동양평화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 처단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옥에 갇힌 아들 안중근 의사에게
간결하면서도 단호한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사진) 조성녀(趙姓女, 마리아)여사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2008년)
사형집행을 앞 둔 옥중 아들 안중근에게 쓴 <조성녀, 마리아> 여사의 편지.
“너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너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너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아시아 평화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사형집행을 앞두고 목숨이 경각일 때,
아들 '안중근'과 어머니 '조성녀, 마리아' 여사가 주고받은 옥중 편지를
어미와 아들의 심정으로 읽으면,
우리 모두는 나라를 위한 진정한 애국이 무엇이며,
나아가 가정의 효와 나라사랑의 큰 효(大孝)의 의미와 큰 교훈을 받게 될 것이다.
당시 안중근(安重根) 장군(의사) 가족은,
어머니 조성녀(趙姓女,마리아) 여사,
부인 김아려(金亞麗) 여사,
장녀 안현생(安賢生, 1902년생),
장남 안문생(安文生, 1905년생),
차남 안준생(安俊生, 1907년생)이 있었다.
안 의사의 어머니 조성녀,마리아 여사는 편지를 보내고
며느리 김아려와 손자 안문생(분도), 안준생을 러시아 연해주로 피신하도록 하고,
자신과 손녀 딸 안현생은 국내에 남는다.
김아려 여사는 두 아들을 대리고 장춘을 거쳐 하얼빈으로 향해 연해주로 가려했다.
힘겹게 도착한 하얼빈에서 김여사는 남편이 "이토(伊藤)"를 쏴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도 일제의 손에 잡혀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풀려나 천신만고로 두 아들을 대리고 연해주로 갔으나,
그곳도 일제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행이 러시아 꼬르뷰로(Корбюро,高麗局) 동포들의 도움을 받아
인근에 정착하었지만 고난은 계속됐다.
(사진) 안중근 의사(장군)의 가족(부인 김아려 여사, 차남 안준생, 장남 안문생)
국내에 남은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성녀(마리아) 여사와 장녀 안현생도 같은 상황에 처했다.
안중근 의사 동생 안정근, 안공근과 그 가족들도
일제의 위협을 피해 야반도주를 해야만 했다.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이토(伊藤)"을 척살한 1개월만에
졸속 판결로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신다.
그 이듬해 1,911년 장남 안문생(분도)이 7살 나이에 비명횡사한다.
낯선 사람이 주는 과자를 먹고 사망한 것인데,
일제의 사주를 받은 밀정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은 가족들은 1,919년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안창호와 김구의 도움으로 러시아에서 상하이로 이주하게 된다.
<안중근 장군의 아들>
장남 안문생(분도)는 7살 나이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밀정의 짓으로 보이는
낯선 사람이 주는 과자를 먹고 비명횡사한다.
상해에서 자란 차남 안준생(安俊生,1907~1951)은
그 아버지와의 삶과 극과 극으로 살았었다.
상해에서 사업가로 활동하던 안준생은
서기1,939년 10월 7일 만주 거주 조선인 시찰단의 일원으로 경성(서울)을 방문했는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위패가 있던 박문사(博文寺: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이토의 절)에서
아버지의 행위를 머리를 조아려 사죄함으로써,
안중근 의사(장군) 및 자신의 할머님 애국심과
대한인(朝鮮人)의 자존심에 똥칠를 했다.
그해 10월 16일에는 서울 조선호텔에서 또 다시,
이토 히로부미의 차남 이토 분키치(伊藤文吉:이토가 하녀를 통해 낳은 아들)를 만나
다시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죄드립니다." 사죄함으로써,
목숨을 바친 아버지의 애국심을 짓밟은 불효자가 되었다. (이상 두산백과사전)
안중근의 아들이 이토의 아들을 만나 사죄한 일은
'이토(伊藤)'를 기리기 위해 지은 '박문사(博文寺)에서 이다.
다음날 매일신보 등 친일신문들은
'그 아버지들에 이 아들들이 잇다' 라는 제목을 써가며
관련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김구(金九)" 선생은 분기탱천하여
안준생을 '호부견자(效父犬子)'라 칭하며
"더러운 변절자는 처단해야 한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실제 <백범일지>에도 해방 후 중국 경찰에게
'안준생을 죽여달라'고 요청하는 내용도 나온다.
그 뒤 "김구(金九)" 선생을 죽인 '안두희'는 또 누구일까?
1939년 10월 이등박문 아들에게 사과하고 변절자가 되어
상하이로 돌아온 안준생을 본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 여사는
"고생했다" 라는 한마디를 건냈다고 한다.
김아려 여사도 생존 때문에 왜적들에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이후 안준생에게 고급주택을 건네며 물질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보장한다.
하지만 1,945년 일제는 패망한다.
안준생은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지나(중국)에 있다가
중공군대(중국공산당)에 밀려 홍콩으로 이주한다.
안준생은 아내 정옥녀와 아들 안웅호와 딸 안연호를 미국으로 보낸 뒤
1,951년 한국전쟁 와중에 혼자 국내로 들어온다.
부산에서 폐결핵을 앓던 안준생은 부산 앞바다에 정박한
덴마크 적십자병원선에서 쓸쓸히 사망한다.
(사진) 안준생(앞줄 왼쪽)이 이등박문 아들 '이토 분키치'(앞줄 오른쪽)에게
사과하는 사진.
<안중근 장군의 장녀>
당시 8살이었던 딸 안현생은 프랑스 신부의 보호 속에 러시아 등을 전전했지만
이후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 후 불문학 등을 공부한 안현생 여사는
6.25전쟁 이후 대구 '효성여자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했던 것으로 처음 확인되었다.
국립대구박물관 이내옥 관장은,
"안의사 따님께서 효성여자대학교에서 재직했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었지만
그 근거는 분명하지 않았다."
대구가톨릭대학교의 전신인 효성여자대학교 자료에서는
안현생 여사가 1,953년부터 3년 동안 문학과 교수로 근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효성여자대학교 40년사 전직 교수 명단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대구가톨릭대학교(전신 효성여자대학교) 이신호 교무처장은
"안현생 교수가 문학과에 근무할 당시
문학과에 조지훈, 구상 선생도 함께 근무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런 사실은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안중근 의사가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
관서지부장을 맡았다는 사실을 추가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발견 확인됐다.
안현생 여사는 효성여자대학교 교수직을 퇴직 후
서울에서 힘들게 생활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안중근 의사 가족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친일파 후손들은 정부요직 고급관리로, 경찰 간부로, 고급 군인으로, 땅 부자로
떵떵거리고 잘 살고 있었건만,
오히려 순국선열 후손들과 애국지사들에게는
빨갱이로 몰아 탄압의 만행을 저질고 있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친일행적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었다.
안현생 여사도 가족 모두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바치고 회생하였건만,
해방된 조국은 오히려 그녀를 방치하고 버렸다.
그녀는 1,959년 겨울 냉 골방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안중근 장군에게 사살처단된 동양평화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진) 동양평화 파괴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탐욕상(酖慾像)'.
(사진) 동양평화 파괴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살처단 하고있는
"안중근 장군(의사)"(합성 사진).
(사진) 동양평화 파괴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살처단한
안중근 장군(의사) 권총과 탄알(실물사진).
(사진) 동양평화 파괴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시체에 밖혀 있던
안중근 장군(의사)이 쏜 총탄(실물사진).
(사진) 동양평화 파괴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살 처단 당시 입고 있었던
피뭍은 속옷(실물사진).
(사진) 동양평화 파괴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장례 행열.
(사진) 동양평화 파괴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살 처단한
안중근 장군(의사) 의거를 대서특필한 신문들~
아직도 독립 못하고 있는 <한민족역사>
밟히고 짤리고 빼앗긴 왜곡된 <한겨레문명>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행한 짓이 아닐까?
倭(일본)을 支那(중조)을 탓 할 수 만 있겠는가??
정신차려 <한민족역사> 야~
<미안합니다><고맙습니다><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