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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발명 로킷화살 <신기전>

松隱 유수(종). 2022. 7. 24. 16:08

려 말 서기1377∼1390경 최무선(崔茂宣;1325~1395)이 만든

<화약(火藥)>과 달리는 불 <주화(走火)>를,

조선 세종30년 서기1448년 장영실이 로킷화살 <신기전(神機箭)>으로 개량하였다.

 

유교 조선사회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을 지향하던 조선 선비들은 

농사를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으로 삼고

기술이나 기계적 사고방식은 배척했기 때문에

유익한 군사기술이나 제반기술이 발명되었어도 

그 신 발명품을 대를 이어 숭상하지 않고 버려 버렸다.

 

이는 문벌(文閥) 만을 숭상하고 무술(武術)및 기술(技術)은 천(賤)시 하는

조선 선비사회 사대부의 풍조 때문이었다.

오늘날도 마찬 가지지만

그 나라의 국력은 경제력과 과학기술력에 따른 군사력이 매우 중요하다.

 

당시 조선사회는 국방기술 군사력 보다는

글 읽기 과거(科試)에만 우수한 인제들이 쏠린 사회로 전락했기 때문에

국력이 점점 쇠약해저 갔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조선의 로킷화살 <신기전> 이야기를 해보자.

<신기전(神機箭)> 종류에는,

<대신기전(大神機箭)>,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

<중신기전(中神機箭)>,

<소신기전(小神機箭)>이 있었다.

 

<신기전>의 약통(藥筒)은 조선종이(한지)로 만든 <로킷화살>로서,

서기1805년 영국의 콩그레브(Congreve,W.)가 제작한 6파운더 <로킷>보다 더 큰,

세계 최초 최대의 종이통 <로킷화살>이였다.

 

서기 1474년 조선 성종5년에 간행된 예서(禮書)에서,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병기도설(兵器圖說)』은  <신기전>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15세기 이전의 <로킷발사 화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인데,

한민족이 세계 최초로 <로킷발사 화살>발명에 관한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서기1592년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함께 <대신기전(큰 로킷발사화살)>을 비장의 무기로 사용하였으나

<대신기전 (큰 로킷발사화살) >은 화약 사용량이 너무 많고 명중률도 낮아 그 사용이 낮아졌다고 한다.

 

(사진) 조선 로킷발사화살 <신기전과 화차(神機箭과火車)>.

 

(사진) <신기전(神機箭) >의 "로킷발사화살" 실측도.

(1) 대신기전. (2) 산화신기전. (3) 중신기전. (4) 소신기전.

 

(1) <대신기전(큰 로킷발사화살)>

대신기전은 윗둘레 1치(30.7㎜), 아랫둘레 3치(92㎜)에 길이 17척(5,210.5㎜)의

긴 대나무(長竹)의 윗부분에 길이 2자2치2푼5리(682.0㎜), 둘레 9치6푼(294.2㎜),

안지름이 2치2리(61.9㎜)의 원통형 화약통(火藥筒)이 부착된 구조이다.

원통형 화약통 속에는 화약을 채우고 아래에는 지름 1치2푼(36.8㎜)의 분사구멍(nozzle)이 뚫려 있어

이곳으로 화약통 속의 연소가스가 밖으로 분출되며 "로켓형 구조"로 무기가 스스로 날아가는 것이다.

 

긴 대나무는 "로켓발사화살"이 앞으로 똑바로 안정되게 날아갈 수 있도록 하는 안정막대기 화살이며,

뒤 끝부분에는 화살날개가 붙어 있다.

화약통의 앞부분에는 '한지통 폭탄'인 <대신기전> 발화통(大神機箭 發火筒)이 부착되어 있어

목표지점까지 날아가서 폭발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 <대신기전>은 세종 때 90개가 제조되어 압록강과 두만강 중류지방에 있던

4군6진에서 여진족의 침략과 재정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대신기전>의 사정거리는 400~500m 정도이다.

 

(2)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

<산화신기전>의 규모는 <대신기전>과 거의 같으나 적진에 ‘불을 지르는 신기전’으로

<대신기전> 발화통을 사용하지 않고 약통의 윗부분에 빈 공간을 만들고,

그 속에 지화(地火)와 발화(發火)를 묶어서 넣은 것으로 화공으로 적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데 사용했고,

조선 효종 때 아무르(흑룡강)를 넘어 오려는 러시아군함을 <산화신기전(散火神機箭)>으로 불질러 

2차례나 전멸시키는 전과를 걷운 역사가 있다.

 

서기2009년 11월 27일 <산화신기전> 발사실험에서

비행 중 2단 로켓인 지화통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하였다.

<산화신기전>은 발사하면 포물선을 그리며 500~600m를 비행해 내려가면서

지화통이 점화되고 지화통은 소발화통이라는 폭탄과 함께 빠르게 적진으로 날아가며

폭발하고 적진을 불바다로 만드는 무기였다.

 

(3) <중신기전(中神機箭)>

<중신기전>은 길이 4자5치(1,379.3㎜) 되는 대나무 앞에 쇠화살촉을 달고,

그 조금 위에 길이 6치4푼(196.2㎜), 둘레 2치8푼(85.8㎜), 안지름 5푼3리(16.2㎜)의 화약통을 부착하였다.

약통의 앞부분에는 종이폭탄 소발화(小發火)가 끼워져 있고

아래의 중앙에는 지름 2푼3리(7.0㎜)의 분사구멍이 있다.

뒷부분에는 새털로 만든 화살깃이 있다.

사정거리는 150m 정도이다.

 

(4) <소신기전(小神機箭)>

<소신기전>은 길이 3자3치(1,011.5㎜)의 대나무 앞에 쇠화살촉을 달고,

그 뒤에 길이 4치7푼(144.0㎜), 겉둘레 2치1푼(64.4㎜), 안지름 3푼7리(11.3㎜)의 한지약통을 달았다.

약통의 양쪽 끝은 종이로 막으며 아래의 끝면에는 지름 1푼3리(4.0㎜)의 분사구멍이 있다.

 

화살의 아래 끝 쪽에는 <중신기전>과 같이 새털로 만든 깃이 있다.

<소신기전>은 <대,중신기전>과는 달리 폭발물이 장치되어 있지 않다.

<중,소신기전>의 발사는 한개씩 빈 화살통 같은 곳에 꽂아 발사하기도 하였다.

사정거리는 100m 정도이다.

 

서기1451년 조선 문종1년에 <신기전기(神機箭機)>를 제작하여 화차에 실어 발사되었다.

<신기전기>는 한번에 100발의 <중신기전>이나 <소신기전>을 장전하여 차례로 발사할 수 있는

"로킷발사화살" 발사틀로 지금의 '다연장로킷 발사틀'과 같다.

 

'로킷발사화살'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약통에 화약을 넣어 빈 공간을 만드는 방식이다.

조선의 경우에는 끝이 뾰족한 송곳을 약통 아래의 분사구멍에 끼우고 화약을 아래부터 다져서 넣는다.

그 다음 송곳을 빼내는 방법을 택하여 약통 속의 화약에 빈 공간을 만들어,

불로써 점화를 하면 동시에 화약이 타들어가는 면적을 넓게 하여 로켓형의 추진력을 강력하게 해주었다.

<중, 소신기전>의 사정거리는 <중신기전>이 150m, <소신기전>이 100m 가량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신기전>은 임진왜란 때에도 사용된 기록이 보인다.

 

(사진) 복원된 한겨레 <신기전>의 발사 시험.

 

최근의 복원 발사시험으로 미뤄볼 때,

지면과 60도로 발사하면 평균 150m의 비행성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신기전기(화차)>와 결합시 한번에 100발을 난사할 수 있다.

<신기전기>에 100발을 장전하고 불을 붙이면 15발씩 동시에 발사된다.

<소신기전>의 쇠 화살촉에는 독약을 묻혀서 사용하였다.

 

<중신기전>은 약통의 앞부분에 ‘소발화(小發火)’라는 작은 폭탄이 달렸다.

화살대는 길이 145cm, 약통 길이 20cm, 반지름이 3cm이다.

목표지점으로 날아가 약통 앞부분에 달린 소발화가 폭발하도록 설계됐다.

소발화는 종이(한지)를 원통형으로 만들고 화약을 넣고 양끝을 막아 사용하는 폭탄이다.

화약에는 쇳조각이 들어 있어 폭발할 때 파편 역할을 한다.

 

<중신기전>은 발사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발사대나 화살통에서 1발씩 발사된다.

서기 1451년 문종(文宗)때 화차(火車)가 개발되면서

한 번에 100발씩 쏠 수 있도록 개량됐다.

 

복원된 <중신기전> 발사실험에서 50g의 흑색화약을 넣고 60도 발사했을 때 250m를 비행했다.

<중신기전>은 <소신기전>보다 멀리 날아가고

작은 폭탄까지 달려 전투에서 무척 효과적인 화약 무기였다.

 

 

<최무선(崔茂宣;1325~1395)의 화포>

최무선(崔茂宣;1325~1395)의 본관은 영주(永州;永川)이며,

고려 의종(毅宗)부터 명종(明宗) 때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내고

연산부원군(燃山府院君)에 봉해진 최한(崔漢)의 6세손으로,

서기1325년 고려 충숙왕12년에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마단(麻丹)마을에서

광흥창사(廣興倉使)를 지낸 최동순(崔東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4세기에 고려는 왜구(倭寇)의 잦은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었는데,

쓰시마(對馬島), 규슈(九州) 등의 왜구들은 고려는 물론 지나(China) 해안지역 까지 약탈했다.

14세기 후반에는 그 규모가 더욱 커져 내륙 깊숙한 지역까지 침입하기도 했다.

그로 인하여 고려는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컸고,

해안 평야지역에 살던 주민들이 내륙산골로 피난하여 평야농토가 황무지로 바뀔 정도가 되었고,

그로인해 조세운반에도 어려움을 겪으며 나라재정에도 타격이 컸다.

 

이에 해적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서 최무선은 화약(火藥)의 필요성을 느끼고

남송(南宋)에서 오는 상인들에게서 수소문하니,

이원(李元)이라는 사람에게서 화약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염초(焰硝) 만드는 법을 배워 화약개발에 성공했다.

 

그 뒤 최무선은 여러 차례 조정에 건의해

서기1377년 고려 우왕3년 화통도감(火統都監) 제조(提調)로 임명되어

대장군포(大將軍砲), 이장군포(二將軍砲), 삼장군포(三將軍砲), 육화석포(六花石砲),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桶),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피령전(皮翎箭), 질려포(蒺藜砲),

철탄자(鐵彈子), 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 유화(流火), 주화(走火), 촉천화(觸天火) 등의

다양한 화기를 개발했다.

그리고 전함(戰艦)에 관해서도 연구해 군사와 장비를 많이 실을 수 있는 누선(樓船)도 개발했다.

 

이처럼 화약과 화기제작을 주도한 최무선은 서기 1380년 고려 우왕6년

왜구가 전라도 해안지역을 침략해오자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직접 참전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화기를 사용해 진포(鎭浦)에서 왜구의 선박 500여척을 격파했다.

서기 1383년 고려 우왕9년에도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서기 1389년 고려 창왕2년에는 박위(朴葳;?~1398)와 함께 쓰시마(對馬島) 정벌에도 참여했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기를 사용하면서 고려는 왜구와의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며,

화기를 해안 지역에 배치하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한 방어체제도 정비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그의 벼슬은 문하부사(門下府事)에 이르렀다.

 

(사진) 최무선(崔茂宣;1325~1395)의 표준영정

조선 건국 이후에는 최무선은 검교참찬(檢校參贊)으로 임명되었다.

서기1395년 조선 태조4년 음력4월19일(양,5월8일)에 죽었다.

 

서기1401년 조선 태종1년에 의정부 우정승과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조선 왕조에서는 화약을 개발해 왜구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최무선의 업적을

목화씨를 가져와 서민생활의 개선에 기여한 문익점(文益漸;1329~1398)과 함께 매우 높이 평가했다.

 

최무선은 백성의 피해(害)를 막았고, 

문익점은 백성의 편이(利)를 일으켜,

백성의 삶에 커다란 혜택을 가져다준 인물들로 숭상되었다.

그래서 서기1401년 조선 태종1년 최무선과 문익점의 아들에게 특별히 벼슬을 내렸으며,

서기1456년 조선 세조2년 양성지(梁誠之;1415~1482)의 건의에 따라

두 사람의 관향에 사당을 세워 업적을 기리게 했다.

 

최무선은 화약 제조법 등을 기록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과 《화포법(火砲法)》을 저술해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래서 아들인 최해산(崔海山;1380~1443)과 손자인 최공손(崔功孫), 증손인 최식(崔湜) 등도

그에게서 화기제조법을 이어받아 모두 벼슬을 하며 조선 전기 군기(軍器) 개발을 주도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서기1487년 성종 18년에 최식이

증조부인 최무선의 책과 그림《화포법》과〈용화포섬적도(用火砲殲賊圖)〉를 왕에게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최무선의 저술은 기록에만 남아 있고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사진) 최무선이 화포와 화약을 만드는 상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