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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호위 <북한산성> <남한산성>

松隱 유수(종). 2022. 10. 3. 16:29

조선시대 <한양도성(漢陽都城)>를 지키기 위해서는 여러 성들이 있었겠지만,

그 중에서 뛰어난 성으로는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이 있었고,

<한강>을 통해 외침을 방어하기 위한 <강화읍성>과 <문수산성>이 있었고, 

내륙 한강 변에는 <행주산성>과 <앗차산성>이 있었다.

 

이들 성곽들의 위치적 짜임세를 보면 <한양도성>을 지키는데

거의 완벽에 가깝게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성곽을 잘 운영할 인걸들이 있었는지는 의문이 들 때가 많다.

 

한반도는 역사기록 이래 외침의 병란(兵亂)은 그리많지 않은 편이지만.

고려시대에 몽고병란이 서기1,232년에서 서기1,269년까지 6차례 있었고,

조선시대에 왜병란이 서기1,592년과 서기1,598년 2차례 있었고,

서기1,627년 정묘호란과 서기1,636년 병자호란 2차례 당하면서 

<한양도성>을 지키는데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강화읍성>,<문수산성>,<행주산성>,<앗차산성>들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것 같다.

 

그 당시 <한양도성>이 외적에게 쉬이 뚤린 것은

이들 요새(要塞) 산성들을 미리미리 보수 축조하고

방어 의지가 투철한 인걸(인물)들이 부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조정에서 사대부라고 거들먹거리고 백성들에게 고혈만 짜던 관리들,

책을 배개삼던 유생들의 비겁 함과 유약 함?

이런 애국심 상실의 조선사회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뱃때지에 기름만 채울 줄 알았지,

애국의 돌 성벽 축조나 보국양병은 꿈도 꾸지 않았던 것이다.

 

대한민국 지금은 어떤가?

국민의 대표라고 금뺏지를 달고 입만 벌리면 악귀처럼 상대를 헐 떳고.

그들의 머릿속에 애국심이 어디 묻어 있기나 하는가?

 

이쯤하고

우리의 <한양도성> 방어에 멋진구조를 가진 산성들이나 알아보자.

 

 

<조선 숙종과 북한산성>

 

<북한산성(北漢山城)>은 사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다투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서기132년 백제 개루왕5년에 도성(都城) 하남 위례성을 방어하기 위해

한강넘어 북쪽에 <북한산성>을 처음 축성(築城)하였다.

백제는 <북한산성>에 핵심 군사력을 배치해서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으며,

백제의 근초고왕이 북진정책을 펼칠 때에는 북벌군의 중심 요새로 삼았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고려 태조 왕의 관(梓宮)을 옮겨 <북한산성>을 중축(重築) 했었다.

서기1,232년 고려 고종은 <북한산성>에서 몽고군과 격전을 벌려

몽고군의 남진을 멈추게 했었고,

고려 우왕 때인 서기1,387년 <북한산성>을 또 개축하였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격심하게 겪으면서도,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조선 숙종 37년 <한양도성>을 증축하자는 의견과

외곽산성 <북한산성>을 보수하자는 주장이 연일 논의 되었다.

서기1,711년 숙종은 왕명으로 <북한산성>을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시작하여

석성(石城) 7,620보(步)를 완성하였다.

당시 완성된 <북한산성>은 대서문(大西門), 동북문(東北門), 북문(北門) 등

13개의 성문을 만들고 동장대(東將臺), 남장대(南將臺), 북장대(北將臺) 등을 설치하였다.

성 안에는 130칸의 행궁(行宮)과 140칸의 군창(軍倉)도 신축하였다.

또한 99개의 우물과 26개의 저수지와 12개의 사찰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 중흥사(重興寺)는 승군(僧軍)을 배치한 136칸의 대찰이 되었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삼국시대의 토성(土城)의 흔적위에

대부분이 조선 숙종 때 석축으로 쌓은 것이다.

 

성위에 낮게 쌓은 담을 여장(女墻)이라 하는데

여장은 무너졌으나 성체(城體)는 대부분 보존되어 있었다.

 

대서문을 비롯해 시설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장대지(將臺址), 행궁지(幸宮址) 등도 그 주춧돌이 잘 보존되어 있어,

서기1,968년 12월 5일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또한 <북한산행궁지>도 서기2,007년에 별도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사진) 북한산성(경기 고양 덕양구 북한동 소재).

 

(사진) 북한산성 행궁.

 

(사진) 북한산성 대동문이 보이는 성곽.

 

(사진) 북한산성 대동문.

 

(사진) 북한산성 선정비 26기나 있다.

 

 

<조선 인조와 남한산성>

 

<남한산성(南漢山城)>은 백제 시조 온조왕이 한강 송파포구와 몽촌토성을 세우고

연이여 산성을 세웠다는 견해가 있다.

 

<남한산성>에 대한 고려시대 기록은 광주부사를 지낸

이세화묘지명(李世華墓誌銘)이나 『고려사(高麗史)』에 몽고군이 침입하였을 때

"광주성(廣州城)으로 피하여 항전하였다."는 것 등이 전한다.

산성 안에서 고려시대 건물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광주성'은 바로 <남한산성>으로 추정된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었는데,

둘레가 3,993보이고 성 안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으며

우물 7곳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성 안의 논밭이 124결(結)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 기록 역시 신라 때 축성된 주장성, 일장성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그후 서기1,636년 인조 14년 후금이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강요했다.

청의 요구에 인조는 청과 일전을 불사한다는 일념으로 척화파를 지지하였지만,

서기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넘은 청군은 6일만에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였고,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게 서울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길이 차단되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서기1,636년12월15일부터 이듬해인 서기1,637년1월30일까지

45일간의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다.

남한산성 항전은 청군 위협 뿐만아니라 거센 눈보라와 맹추위와도 싸워야 하는

악조건 속에 진행되었다.

청군도 그 추위는 마찬 가지 였을 진대

친청파의 설득에 무너진 인조의 실수였다.

이 또한 청니라 작전 내부 분열~~.

 

그 혹한은 몽골군이 더 느꼈을 것인데?
날씨 핑계로 항복을 하다니? 

 

서기 1,637년1월30일 인조는 항복의식을 치르기 위해 산성을 나와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지금;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삼전도'로 향했다.

 

말에서 내린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500여 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나라 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올렸다.

삼배구고두는 여진족이 천자를 뵈올 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다.

의식이 끝난 후 인조는 소파진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한양도성으로 돌아오는 뱃길 사공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빈 배 두 척만 있었는데

높은 관리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고 몸싸움을 하메,

왕 인조의 옷소매까지 붙잡히는 아비규환을 보고,

쯪쯪 혀를 차던 청 나라 장수 용골대가 인조를 호위하며 강을 건너게 했단다.

 

이 광경을 지켜 본 1만여명의 백성들이 강 옆 길가에서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며 울부짖었다고 전한다.

 

(사진) 남한산성의 개략도.

 

(사진) 남한산성 석벽.

 

(사진) 남한산성 행궁(보수).

 

(사진) 남한산성 수어장대(군사 총 지휘소).

 

(사진) 남한산성 선정비.

 

(사진) 남한산성 남문.

 

(사진) 조선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올린 삼전도 치욕의 비.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소재, 가로 25.2Cm 세로 30.3Cm .

-비에는 몽골어, 만주어, 한문으로 쓰여저 있단다. 

 

<배달민족>의 고대역사는 동북아시아의 맹주였지만,

새월이 흘러 세월이 지나 갈 수록 약소민족화되는 역사?

그 원인이 무엇인가? 

곰곰 생각해 보면

단단한 알갱이 들만 모인 정치적 내분(?)이었다.

 

국가 전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지 않고 

개인적 가문적 이익을 먼저 챙기는 사대부 사고방식 때문이  아닌가?

"나라는 망하던 우리가문만 유지하면 된다"는 사고방식?

어떻게 나라 없이 우리가문이 안전할 수 있겠는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대부들이 권력을 잡고 백성들 위에 군림했고,

그 바탕 위에 왕(나라)이 존제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가?

지금 정치인-권력자들 중 누구하나 나라위한 애국자가 있는가?

몰라~~

노화로 흐릿해져 가는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미안합니다><고맙습니다><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