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러 전쟁>아무르 땅을 지킨<조선>효종대왕.
<조선 효종의 제정나선(帝政羅禪;제정러시아) 정벌>
17세기 제정 나선(羅禪,러시아) 코작크군대가 신식소총으로 무장하고,
조선인 소수 부족들이 살던 동토의 땅 서백력(시배리아)에
호피,수달피, 금 및 광물을 얻어려 무저항 진격한다.
그들은 무저항 진격의 땅을
자신들 지도에 그려넣어 편입시켜 가며
동진 동진(東進)하고 있었다.
식량과 물자가 부족해진 제정러시아 군대는
아무르(黑龍江) 유역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서기 1,651년 <조선> 효종대왕(재위 1649~1659) 2년에
아무르 오른쪽강변(右岸) '알바진'을 건축하고,
이듬해에 오소리강(烏蘇里江) 하구까지 내려와 성을 쌓고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진출하며
조선인(고려인) 원주민을 죽이기 까지도 했다.
당시 신식소총으로 무장한 제정러시아 군대는
<고대조선> 후예 근대조선인(고려인)들이 살고 있던,
서백력(시배리아),
축지(춥지)반도,
캄차카(깜짝가)반도,
사하린과 연해주로 무저항 진격해 와서 조선조정과 합의도 없이
무작정 러시아 영토로 편입시켜 자신들의 지도에 그려 넣고 있었다.
서기1,651년 아무르(黑龍江)을 건너 <근대조선>의 실지 영토까지 남진하려 하자,
<근대조선>의 '효종대왕'은 군대를 파견해 2차례나 나선정벌(조-러 전쟁)을 단행하니,
기세 등등하던 제정러시아 최 정예 신식군대의 남진도 더 이상
조선의 땅을 유린하지 못했던 <조선의 역사>가 있다.
'아무르' 의 명칭은
고려인(조선인) 원주민들의 말의 뜻,
"큰 물"을 뜻하는 '아~물(아 미르)' 라는 고대조선 말을
러시아 군대가 듣고 발음 그대로 표기한 이름이 '아무르'인 것이다.
제정러시아 군대가 '아무르' 유역의 고려인(조선인) 터전에 침입하여
조선양민에게 수달피 등 피역과 광물 채굴 등 피해를 입히는 것을 참을 수 없으니
불벌을 준비해 오신 <조선>의 효종대왕께서는 <조선>의 조총부대를 보내어
나선(러시아)정벌을 시작하신 것이였다.
수천년을 이곳 아~미르(아무르) 유역에서 사냥과 고기잡이로 풍요를 누리고,
순록을 길들여 가축으로 키우며 살아오던 <고대조선>의 후손 고려인들을
<조선조정>은 <조선백성>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르'는 '아~미르(아~물)'을 뜻하는 고대조선 말>
아무르(아~미르)는 몽골에서 발원하여 혼동강(混同江)이란 이름으로 흐르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송화강(松花江)을 만난 후부터 "아무르(아~미르;큰물)"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송화강(松花江)을 이루는 '이도백하(二道白河)'는
'백두산(白頭山) 천지' 물이 69m 높이 비룡폭포(장백폭포)에서 털어져
발원하는 것이니 아무르(黑龍江) 역시 백두산 천지가 발원지로서
고대부터 전통적으로 송화강과 아무르는 조선인들의 터전으로 여겨저 왔다.
그 먼 옛날 동북아시아 기온이 올라가고 비가 많이 내려 물이 풍부한 기후일 때,
<단립벼 재배혁명>을 이룩한 한반도 <고대조선인>들은
쌀 농사 지을 수 있는 땅를 찾아 백두산-이도백하-송화강-아무르를 따라
북상하여 몽골 대평원 <천산> <천해>로 이주하거나,
남하하여 <연해주>, <사하린>으로 이동 했었다.
그들은 <쌀>농사가 잘 되지않는 추운지방에서는
말, 순록, 사슴을 길들여 가축화시켜 가며
더 북쪽 캄차카(단아파), 축지(춥지)반도, 서백력(시배리아)으로 이주해 가기도 했다.
그들은 <고대조선> 예족(濊族)인 신조선(진조선)과
<고대조선> 건국에 참여한 이리 토템을 가진 훈족(흉노족,스키타이족) 무리들이었다.
또한 그들 일부 부족은 송화강의 사간호(查干湖)에서 고기잡이를 하다
아무르 상류 혼동강(混同江)을 따라 점차로 천산-천해(바이칼호)로 이동해
후일 기마민족(騎馬民族) 훈족(스키타이족), 몽골인, 사하인의 조상들이었다.
다른 무리는 아무르 하류 '연해주', '오오츠크해(옥저해)', '사하린', '캄차카', '축지반도' 까지
퍼져 나갔고 이들은 이곳 <아무르> 유역은 '고대조선인'들의 전통적 활동무대였던 것이다.
또 더 많은 '고대조선인'들은 '사하린', '캄차카반도', '축지반도'에서
가후의 변화로 쌀 농사가 어려워지자 순록을 키우는 유목민이 되기도 했다.
그 중에서 일부 무리들은 소리소문없이 '캄차카', '알류산 열도'를 따라건너
'알래스카'로 넘어가 '아메리카 인디언'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남미의 잉카문명, 중남미의 마야문명, 북미의 아즈택문명을 이룩한
<고대조선>의 후예 조선인(고려인)들 이었다.(배제대 손성태 교수 논문 참고)
그들은 지금 우리들이 먹고 마시기 전,
행하는 <고시내(고수래)>풍속을 지금까지 행하고 있는
남미 패루인, 북미 맥시코인, 대륙 몽골인,우즈벡인 모두가
우리 <한겨레문명>에서 갈라진 <고대조선민족>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고대조선, 단군조선의 강역 백두산에서 발원한 송화강과 <아무르> ,
천해(바이칼 호)와 사하린 섬, 캄차카(단아파) 반도 오호츠크(옥저해) (위성지도)
(사진) 아무르 유역 <고대조선인> 활동무대(노랑색).
<효종대왕의 나선(러시아)정벌, "변급(邊岌) 장군"과 "신유(申瀏 장군">
서기1,651년 조선 효종대왕 2년,
제정 러시아 신식군대는 이무르(아~미르;黑龍江) 오른쪽 언덕에 성을 쌓고
호피, 수달피 가죽과 금 은 광물을 취하며,
그 활동 범위를 점차 넓혀 아무르를 건너 송화강(松花江)을 타고 남하하려 하고 있었다.
서기1,654년 <조선> 효종대왕은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邊岌)" 장군에게
조총 군대 100명과 보병(哨官) 50여 명을 주어
목단(牧丹)강 상류 영고탑(寧古塔/寧安)으로 진출시켜
제정나선(제정러시아) 군대를 막게 하였다.
청나라는 다루가치 및 사절을 보내어 조선의 조총수를 보내어 막아 달라고 요청했다.
<조선>의 효종대왕 군대는 송화강(松花江)과 아무르 중류 혼동강(混同江)에서
서기 1,654년4월 28일 러시아군대를 만나 대치하게 된다.
"변급" 장군은 대치 7일만에 러시아군대을 패퇴시키고
그해 6월에 한성으로 개선하였다.
이를 1차 "라선정벌"이라 한다.
이 때 라선(羅禪;러시아)는 처음 <조선> 조총군(銃手)의 위력을 경험했었다.
서기1,658년 효종대왕 9년에 라선(러시아)군대가
또 다시 이무르를 건너 <조선> 백성을 침달한다는 급보를 접하고,
혜산진 첨사 '신유(申瀏)' 장군에게 명하여
<조선> 조총부대 200명과 보병(초관) 60여명을 주어 라선군대를 물리칠 것을 명령하였다.
이 때 청나라는 조선 땅 '영고탑'에 있던 '다루가치'를 시켜
효종대왕의 2차 "라선정벌"에 숟가락을 하나 더 놓은 격이었다.
"신유(申瀏)" 장군은 송화강이 아루르와 합류지점에서
제정러시아 "스테파노프" 장군 군대와 서기1,658년6월10일 접전을 벌였다.
러시아군은 10여 척의 군함을 앞세우고 대포와 신식소총으로 공격해 왔다.
'신유' 장군은 아군의 빈약한 배로는 불가함을 느끼고 후퇴하여
아무르 강뚝에 진지를 구축하고 조총(鳥銃)과 화전(火箭)으로 맞서며,
흑히 산화신기전(로킷발사 신기전)으로 러시아 군함 10여척을 불살라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스테파노프" 장군을 포함하여 러시아군 270여 명을 전멸시켰다.
2차 <조-러전쟁>으로
러시아는 조선군대의 용멩함으로
혼이 빠져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였다.
아와같이 혼돈강, 목단강, 송화강, 흑룡강(아무르) 유역과,
연해주, 사할린, 캄차카 및 축지 반도는 <조선백성>들이 살았고
<조선>이 제정러시아의 남진을 방어한 <조선 땅>이 였음이 확인되었다.
신유 장군의 북정일기(北征日記)에서
마치 청나라가 주최한 싸움에서 조선이 파병한 것 처럼,
혹자(惑者)들이 '아무르' 지역이 청나라 땅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니다.
당시 조선 효종대왕 아버지 인조 때
청나라 친입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직후로서
효종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수년동안 밖해를 받아
언잰가는 청나라를 정벌할 '북벌정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당시 준비된 왜국의 조총을 개량연구하여
효종대왕은 중앙군과 지방군까지도 조총군대를 잘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 '영고답'에 파견되어 있었던 청나라 '다루가치(관리)'의 보고에 의하면,
대포와 신식소총으로 무장한 라선군대가 아무르(룡강)을 넘어 침범해 오니
조선군대를 파견해여 막아야 한다고 요청함으로
조선의 효종대왕이 "신유"에게 조선 중앙조총군 200명을 주어 판견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군이 도착하자 청군은 지휘관 몇 명만 있을 뿐 청군병력은 없었다.
신유는 조선군대의 지휘권만 빼았긴 샘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조총군대는 청 지휘관의 말을 듣지 않고 조선 지휘관 말을 듣고 잘 싸워
러시아 군대 '스테파노프' 장군과 러시아군을 전멸 시켰다.
그러나 청 나라의 총지휘관이 잘못내린 명령으로
조선 조총군 유복억(劉卜檍)등 7명이 아깝게 전사했을 뿐이다.
이와같이 '신유'의 '북정일기'는 당시 청나라의 박해를 받은 조선이
청 나라 '다루가치'에 의해 개전 초기 조선군대의 지휘권을 빼앗겨,
조선군대가 청나라 다루가치 지휘를 잘못받아
7명의 사상자를 낸 피해받은 기록을 보아 나타나고 있다.
당시 러시아(羅禪)의 '아무르 대전기록(對戰記錄)'은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청 나라 군대와의 전투기록은 전연 없고,
모두 조선군과의 전투기록만 있을 뿐이다.
이는 당시 러시아가 조선군과 전투했음을 증명해 준다.
그래서 "신유"의 '북정일기'는
당시 청 나라의 '다루카치'에 대한 설음과 핏박을 상세히 기록한 것일 뿐,
'아무르 유역'이 조선의 전통적 땅 <고향>이 었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무르(아~미르) 땅은 전통적,역사적으로도 <조선의 국도> 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조-러>전쟁에서
청 나라 지휘관 다루가치 몇 명을 제외하고는
병졸들은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신식 러시아 군대를 조선 구식군대가 용감히 방어한
그 방대한 <아무르 유역 조선 땅>를
왜정 36년간 일제가 '괴뢰만주국'을 만들 때 편입시켜 '만주국'으로 변화시켰다.
그 뒤, 이 영토가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중화민국'에 불법편입되었고,
애석하게도 장개석의 중화민국이 대륙에서 쫒겨나고,
지금 '중공(중국인민공화국)이 불법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대한민국 위정자들은 물론 북한 김씨 정권은
중공과 러시아에 이 땅 반환을 요구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고 어리석은 후손들이 아닌가?
이 어리석고 한심한 후손들아
너희들이 어찌 약소민족의 애환이라고 변명 만 하고 있는가?
지금 세계 강대국 6위에 올랏다고 토하고 있으니
이제는 우리 조상 피 흘린 그 땅들을 싸그리 다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반드시 찾아야지~!!
(사진) 조선군의 1차 2차 나선(러시아)정벌 진행도.
- 17세기 동북아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조선군대가 막았으니 이 지역은 조선 땅이 명백했다.
- 청 나라의 진입표시는 지휘관 몇 명이 참전하여 고문관 역활을 했을 뿐이다.
<변급(邊岌 ?~?) 장군>
변급(邊岌)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인으로
1차 나선정벌에 출전하여 러시아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전라도 수군절도사, 충청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변급의 출생과 집안 내력에 관해 알려진 바가 없다.
서기 1,654년(효종 5) 함경도 병마우후(咸鏡道兵馬虞候)로 근무하였는데
당시 아무르(흑룡강)를 따라 남하하는 러시아군을 막기 위해 조선의 소총병이 출정하였다.
조선에서는 변급을 영장(領將)으로 임명하여 나선정벌(羅禪征伐)에 출전하게 하였으며,
변급은 조총군(鳥銃軍) 150여 명을 거느리고 아무르(흑룡강)으로 진격한다.
영고탑(寧古塔:寧安)에서 후통강(厚通江:混同江)에 이르렀을 때,
러시아군을 맞아 총격전을 벌였다.
조선군은 러시아군에 비해 화기의 성능이 미약해 처음에는 고전을 하였으나,
강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총격전을 벌였다.
러시아군이 상륙하여 공격해오자 집중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혔다.
러시아군은 아무르(흑룡강) 상류를 따라 철군하였으며
변급 장군은 강변에 토성을 쌓아 방비케 하고 개선했는데,
조선군은 단 1명의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효종대왕은 신식군대 러시아를 물리친 변급 장군의 공로를 인정하고
서기 1,656년 그를 전라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임명했다.
그 뒤를 현종이 즉위하자 충청도(忠洪道) 수군절도사로 전보되었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이후로 조총을 사용하는 부대를 양성하여왔는데,
북벌의 기회를 노리던 효종에게는 청군의 허실을 알아볼 수도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출병을 허락하였으며 조선군은 조선 총수의 위력을 십분 발휘하고 돌아왔다.
1656년 전라도수군절도사가 되고 현종이 즉위하자 충홍도수군절도사(忠洪道水軍節度使)로 전임되었다.
<신유(申瀏 1619∼1680) 장군>
신유(申瀏)는 무신으로 서기 1,646년 인조 24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서기 1,658년 효종대왕 9년 함경북도 병마우후(兵馬虞候)로 있을 때
효종대왕의 명을 받아 영장(領將)으로서 조총군(鳥銃軍) 200여 명을 인솔하고
2차 나선정벌(羅禪征伐)을 실시했다.
이때 아무르(黑龍江) 부근에 침입한 러시아군의
지휘관 스테파노프(Stepanov)이하 270여 명을 전멸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이 원정(遠征)의 전말(顚末)은 신유의 『북정일기(北征日記)』에 기록되어 전한다.
(자료;한국민족문화대백과)
신유(申瀏)는 경상도 인동(仁同),
현, 칠곡군 북삼읍 강진마을에서 태어나,
경상도 칠곡군 약목면으로 이주해 성장했다.
그의 출생 집터가 북삼읍 강진마을에 유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사진) 러시아를 정벌한 신유 장군을 모신 숭무사(崇武祠)-현 경북 칠곡군 약목면.
서기 1,680년 조선 숙종6년에 장군이 62세로 별세하자,
왕이 제문(祭文)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 제사하게 하고
경북 칠곡군 약목면 남계리 숭무사(崇武祠)에 제향하고 경내에 신도비를 세웠다.
6·25전쟁 때 포격으로 모두 불타고 파손되었다.
그 후 후손들에 의해 숭무사와 신도비가 복원되어 남아있다.
숭무사 뒤 200m 지점에 신유 및 정부인(貞夫人)의 묘(墓)가 있다.
매년 음력 정월 15일에 향사(享祀)하고,
3월에는 후손들이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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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수록된
'나선정벌(羅禪征伐)' 내용을 그대로 복사해 옮겨놓은 것이다.
나선은 러시아 사람들, 즉 러시안(Russian)을 한자음으로 옮긴 것이다.
이들은 방면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서,
1651년(효종 2) 흑룡강 우안(右岸)의 알바진(雅克薩) 하구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부근의 수렵민들과 분쟁이 생기고 청나라 군사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듬 해 러시아인들이 다시 하구에 내려가 성을 쌓고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군사를 보내어 공격, 축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구식 장비의 청군으로서는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을 당하지 못해 번번이 패배하였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조선 조총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1654년 2월에 청나라 사신 한거원(韓巨源)을 보내어 조총군사 100명을 뽑아
회령을 경유, 3월 10일까지 영고탑에 보내주도록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의견에 따라
함경도병마우후 변급(邊岌)에게 조총군 100명과 기고수(旗鼓手) 등 50여명을 거느리고
출정하도록 하였다.
그 해 4월 영고탑에 도착한 조선 조총군은
청나라 군사와 합류, 흑룡강 방면으로 떠났으며,
20일에 왈가(曰可) 지방에서 배를 타고 후통강(厚通江)으로 내려갔다.
28일, 흑룡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러시아군을 만난 조선 조총군들은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적군의 기세를 꺾고 계속 추격,
적군은 7일 만에 도망갔다.
조선 군사는 전승을 거두고 5월 16일에 회군해
6월에 본국으로 개선하였는데,
이것이 제1차 정벌이었다.
그 뒤에도 러시아군이 흑룡강 방면에서 계속 활동하고
이에 대한 청나라 군사의 출정이 자주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1658년 3월 청나라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선 조총군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혜산진첨사 신유(申瀏)를 대장으로 삼아
조총군 200명과 초관 · 기고수 등 60여명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다.
조선 군사들은 5월에 영고탑에 들어가 청나라 군사와 합류, 흑룡강에 나아갔다.
6월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러시아 군사를 만났다.
러시아측에서 큰 배 10여척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공격하고
육상에서도 적군이 공격을 해오자 청나라 군사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 군사가 용감하게 나아가 화전(火箭)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흩어져 도망갔다.
이 전투로 흑룡강 방면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군사의 주력이 거의 섬멸되었다.
조선 측에서도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들은 청나라의 요청으로 얼마 동안 송화강 방면에 머무르다가
그 해 가을 영고탑을 거쳐 개선하였다.
이것이 제2차 정벌이었다.
2차에 걸친 러시아 정벌은 효종의 즉위 후부터 준비해왔던 북벌계획을 간접적으로 실현한 결과였다.
이 때 비록 적은 수의 군사를 보냈으나
큰 전과를 올리게 된 것은 당시 사격술과 전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안합니다><고맙습니다><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