實史古朝鮮(환인칸국+환웅배달국+단군조선국).
동북아시아 '문명의 발상지'는
<고대조선>부터 시작된다.
지나(China)의 고대역사서에서도
상 나라와 주 나라는
<고대조선> 동이족 나라로 기술하고 있다.
<고대조선>은 '한반도' 중부 청원지방에서
기원전(BC.) 10,550년 '재배 벼' 시원지가 확인되었고.
만주지방(홍산문화) 기원전(BC).8,000년~3,000년 경,
<고대조선>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대조선(古朝鮮)>의 실사(實史)는
<삼성기(三聖記)>상,하,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상,하,
<태백일사(太白逸史)>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 역사는
친일사학자(특히 이병도 학파)들이 위서(僞書)라고 팽게친
고대조선(환인 칸국+환웅 배달국+단군 조선국)의 역사를
금석기록과 고고학적 유물 및 유적들 만 근거한 내용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편찬한 역사 책,
[신단민사(神檀民史)]에서는
거란이 세운 요(遼) 나라,
여진이 세운 금(金) 나라,
말갈이 세운 후금 즉, 청(淸) 나라가
조선민족(배달민족)이라 기술하고 있다.
아래에 발췌한 네용은,
<환단고기>,<삼국유사>,<삼국사기>를 근거로 하고
지나(China)의 여러 고서 '회남자', '산해경' 등은 참고했으나,
특히 대종교 등,
일부 종교가 주장하는 내용은 배재하였음을 밝힌다.
고대조선(환인 칸국+환웅 배달국+단군 조선국)의 강토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
태행산맥을 포함한 중원대륙(China대륙) 전부 ,
천산산맥, 천해(바이칼호), 아무르강 유역 전부,
오호츠크 바다(옥저 바다)연안, 사하린, 캄차카를 전부였다.
또한 그들은 알류산 열도를 건너
사람이 없던 북미대륙을 건너가
아메리카 원주민이 되었다.
(사진) 그 근거 "회남자" 기록.
(사진) [신단민사(神檀民史)]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교과서>.
- [신단민사]에는 요(거란),금(여진),청(말갈),
이들 나라가 한민족역사로 기룩되어 있다
(사진) [신단민사(神檀民史)]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교과서>.
- [신단민사 신단실기] 속의 <단군세기(檀君世紀)>.
https://youtu.be/vnTg8YuHCd4?si=Qzzh2oiWRMkEMrMK
https://youtube.com/shorts/tqsVrjEg8oo?si=Zyp7b7KYoCewjkWG
박석재 박사의 "천문학으로 본 고대조선과 배달국"
https://youtu.be/VkDNk3Ld5S8?si=TJcBeGrvhoZ4qlzQ
https://youtu.be/noFZgCH8888?si=tJ9yvp_TT8-W4tEs
https://youtu.be/99mhyqV3etI?si=QBmM43TYTOvsGROS
1, 환인 <칸국(桓國)>
"먼 옛날
한 기(氣)가 높은산(太白) 동쪽 하늘에 있었는데,
그는 홀로 변화하여 신(神)이 되셨다.
그 신은 밝은 빛으로 우주를 비추어
삼신(天,地,人)으로 분리되고 서로 묘합(妙合)하여
만물을 생성 변화(化生)하니
그는 권능을 가지시어,
만물이 장성하고 오래 사는 것을 보시고는
항상 기뻐하시며 타고 노닐며
기(氣)가 오묘(妙)하게 저절로 그리 됨을 기꺼워 하시었다.
그는 형상이 없는데도 볼 수 있고,
행동이 없는데도 이룰 수 있고,
말씀이 없는데도 행할 수 있으셨다.
어느날,
동녀동남 800을 대리고
흑수(아무르강)에서 백산(太行山 渴石山)까지의 땅에 내려오셨다.
그 무리를 하늘임금 <환인(桓因)>께서 감독하셨다.
<환인>께서는 하늘 세계에서 땅으로 내려와
돌을 쳐 불을 일어켜서 읶혀먹는 법을 가르치셨다.
이 지역을 환국(桓國;한국;칸국)이라 하셨고,
이로서 하늘임금(天帝) <환인>의 나라이라 했다.
또한 안파견(安巴堅;아버지 원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칸국(桓國)은 일곱세를 이어갔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太古有一氣 在斯白力之天 爲獨化之神 光明照宇宙 權化生萬物
長生久視 恒得快樂 乘遊之氣 妙契自然 無形而見 無爲而作 無言而行.
日降童女童男 八百於 黑水白山之地於是 桓因亦以監羣
居于天界 掊石發火 始敎熟食
謂之 桓國是 謂天帝桓因氏 亦稱 安巴堅也
傳七世 年代不可考也]
칸국(桓國) 여섯쩨 "구을리(邱乙利)" 천제께서
천해(天海;바이칼호)를 떠나시며 부르신 <칸국노래>,
"아랑 아랑 아르리 아르이고" 가 남아 있는대
이 <칸국노래>는 아리랑의 근원으로 보고있다.
이 <칸국노래>를 해석하면,
"우리郞 우리郞 우리郞들아 부디 이겨라"로서
<칸국(桓國)>의 전승가(戰勝歌) 였다.
칸국(桓國) 환인천제(桓因天帝)계표 (BC 7198년 ~ BC 3898년)
환인천제(桓因天帝) - 7대, 3,301년 (환기 1 ~ 3301, BC 7,198~BC 3,898)
세(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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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인(桓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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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년도(桓紀-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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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略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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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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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파견(安巴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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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기1 - BC7,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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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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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 서(赫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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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만리에
<칸국의 법>을 전했다.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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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리(古是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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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서는 700년의 수명을 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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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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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우양(朱于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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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귀리가 있어
동방 삼역에 <삼의법>을 전함.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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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제임(釋提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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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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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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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을리(邱乙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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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제(天祭)를 올리는 <소도제천>시작. 삼묘산 아래에 "서자부(庶子部)"를 세웠음. 구을리(邱乙利) 환인이 천해(天海)를 떠나시며 부른 노래 아리랑의 근원. "아랑 아랑 아르리 아르이고"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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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리(智爲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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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표는 셋별 님이 올린 자료임을 밝힙니다.
(사진) 고대조선(古朝鮮) <환인 천상 강림도> - 환인 <칸국>의 건국의궤(建國儀軌).
- 산동성 가상현 무씨사당 석실 화상석 (서기 1,786년 산동성 출토).

(사진) 환인 칸국시대 유라시아 대륙의 인류.

2, 환웅 <배달국(倍達國)>
"계속하여 환웅(桓雄)씨가 일어나 하늫에 받들어 고하고
백산(太行山脈 渴石山)과 흑수(아무르강) 사이에서 우물을 파고(鑿子井女井)
넓고 물 좋은 땅(天坪井地)을 찿아 청구(靑邱;만주평야)라 하였다.
그는 천부인(天符印)을 가지고 다섯가지 일을 주관하시는데,
세상을 교화시키기 위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치를 설하시고,
도읍을 <신시(神市)>라 하고
나라 이름을 <배달겨래(밝달겨래)> "태양의 민족"이라고 불렀으며,
三七일을 택일하여 하늘(테양)에 제사를 지낼 때,
바깥 물건은 꺼리고 근신하며 문을 걸어 잠그고 (만달라)주문을 외우며
몸을 닦아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더니
단약(丹藥)을 드시고 신선(神仙)이 되시었다.
그는 우주 태극을 이루는 팔괘(八卦)를 그으시고
점을 쳐(象) 신명(神命)과 수많은 혼령(羣靈)을 움직이고,
모든 철학자(諸哲)들에게 보필하도록 하더니,
웅족 공주(여자)를 거두어 황후로 삼고 혼례의 법을 정하매,
짐승 털가죽으로 패물을 삼았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가축도 기르고 시장도 열어 서로 교환하고,
아홉 성(九城)이 조공을 바치니
새족(봉황 토템족)에 더하여,
곰족(곰 토탬족), 범족(범 토탬족), 늑대족(이리 토탬족)이 함께 춤을 추었다.
뒷 날 사람들은 그를 세상 최고의 신(神)이라고 받들어
새새토록 하늘 제사(天祭)가 꾾김이 없었다.
신시배달 말기에 자오자(治尤) 천왕이 청구(靑邱)를 버리고
산동(山東) 2궁으로 들어가니 18세를 전하고 1,565년을 누렸다.."
[桓雄氏繼興 奉天神之詔 降于白山 黑水之間 鑿男井女井於 天坪劃井地於 靑邱
持天符印 主五事 在世理化 弘益人間
立都神市 國稱倍達 擇三七日 祭天神忌 愼外物閉門 自修呪願有功
服藥仙成 劃卦知來 執象運神命 羣靈 諸哲爲輔納 雄氏女爲后 定婚嫁之禮
以獸皮爲幣 耕種有畜置市交易 九城貢賳 鳥獸率舞
後人奉之爲 地上最高之神 世祀不絶
神市之季 有治尤天王 恢拓靑邱 傳十八世 歷一千五百六十
(사진) 고대조선(古朝鮮) <환웅 천왕 행차도> - 환웅 배달국 건국 의궤(建國儀軌) .
- 산동 2궁 가상현 무씨사당 석실 화상석 (서기 1,786년 산동성 출토). .

(사진) 고대
(사진) <환인>천황께서 <환웅>천왕에게 내려 준 <풍백>과 <뇌공>의 이야기.
- 서기 1,786년 산동성 출토.

(사진) <환인>천황께서 <환웅>천왕에게 내려 준 <우사> 이야기.
- 서기 1,786년 산동성 출토.

(사진) 전쟁의 神(화하족이 한번도 이기지 못한) < 자오지(蚩尤) 천왕(天王)> .
- 산동성에서 출토된 <자오지(蚩尤)> 천왕(天王) 귀면 기와.

(사진) 자오지(蚩尤) 천왕(天王)의 치우샘(治尤泉).
- 산동성 소재 현존.

(사진) 자오지(蚩尤) 천왕(天王) 나무 치우목(治尤木)으로 알려지고 있는 고목
- 산동성 소재 현존.

(사진) 자오지(蚩尤) 천왕(天王)의 릉(治尤 陵).
- 산동성 소재 현존.

배달국 한웅천왕 계표 (BC 3,898 ∼ BC 2,333)
한웅천왕(桓雄天王) - 18세, 1,565년 (桓紀 3,301 ~ 4,866, BC 3,898 ∼ BC 2,333)
세(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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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天王)
|
즉위년도(桓期-BC)
|
재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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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略史)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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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발한(居發桓)
|
3301-BC3898
|
94
|
마지막 환인(桓仁)지위리(智爲利)의 명을 받고 한웅(桓雄)께서 풍백,우사, 운사와 함께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의 신단수 아래 내려오시니 이를 신시(神市)라 한다.
한웅(桓雄)께서 풍백,우사, 운사에게 명하여, 농사를 주관하고, 삶을 주관하며, 형벌을 주관하고, 병 을 주관하시고, 선악을 주관하면서 무릇 인간의 360여사를 두루 주관하시사, 세상의 이치대로 교화하. |
2
|
거불리(居佛理)
|
3394-BC3804
|
86
|
|
3
|
우야고(右耶古)
|
3480-BC3718
|
99
|
|
4
|
모사라(慕士羅)
|
3579-BC3619
|
107
|
|
5
|
태우의(太虞儀)
|
3686-BC3512
|
93
|
12아들 중 막내 아들이 복희(지나 시조3인)이다.
그의 딸은 여와씨이다. |
6
|
다의발(多儀發)
|
3779-BC3419
|
98
|
|
7
|
거 련(居連)
|
3877-BC3321
|
81
|
|
8
|
안부련(安夫連)
|
3958-BC3240
|
73
|
|
9
|
양 운(養雲)
|
4031-BC3167
|
93
|
|
10
|
갈 고(葛古)
|
4127-BC3071
|
100
|
독로한
|
11
|
거야발(居耶發)
|
4227-BC2971
|
92
|
|
12
|
주무신(州武愼)
|
4319-BC2879
|
105
|
|
13
|
사와라(斯瓦羅)
|
4424-BC2774
|
67
|
|
14
|
자오지(慈烏支)
|
4491-BC2707
|
109
|
일명 '치우천왕'.
'헌원'과의 10년 73회의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고 '헌원'을 신하로 삼았으나 헌원은 다시 배반했다.. 최고의 <전쟁신(戰爭神)으로 오늘날까지 추앙 받고 있다. |
15
|
치액특(蚩額特)
|
4600-BC2598
|
89
|
|
16
|
축다리(祝多利)
|
4689-BC2509
|
56
|
|
17
|
혁다세(赫多世)
|
4745-BC2453
|
72
|
일명 홍제
|
18
|
거불단(居弗檀)
|
4817-BC2381
|
48
|
거불단 환웅은
단군임금의 아버지다. 일명 단웅(檀雄). |
단군조선으로
(4865-BC2333) |
3, 단군 <조선국(朝鮮國)>
그 후,
신인(神人;신에 버금가는 사람) 임금(壬儉)이
불함산(갈석산) 박달나무(檀木;소사나무) 아래 터를 잡았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했으니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어 나라를 세울
인륜도덕의 뜻과 법이 넓고 높고 강열하였다.
이로서 구한(九桓;칸국의 아홉족속) 백성들이 마음 속 깊이 복종하니
그를 받들어 천제(天帝)의 화신이라 하여,
그를 천제(天帝)로 모셨는데,
곧 단군임금(檀君壬儉)이시다.
단군임금(檀君壬儉)은 신시(神市)의 오레된 규범을 되찾고
도읍을 아사달(장안)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後神人壬儉 降到于不咸之山 檀木之墟其至 神之德兼 聖之仁乃
能承詔繼天而 建極巍蕩惟烈 九桓之民 咸悅誠服 推爲天帝化身 而帝之是 爲檀君壬儉
復神市舊規 設都阿斯達 建開國 國號朝鮮]
"단군은 고요히 앉아서 맨손으로 인간세계를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를 얻어 수많은 생명들을 교화시켰으니,
팽우(彭虞)로 하여금 토지를 개척하게 하였고,
성조(成造)로 하여금 궁실을 세우도록 하였으며,
고시(高矢;고시네 풍습)로 하여금 씨뿌려 농사를 주관하도록 하였고,
신지(臣智)로 하여금 속용문자 <녹도문자>를 만들게 하였고,
헌원(軒轅)과 기성(奇省)으로 하여금 의약(돌침 砭石과 탕약)을 설립하게 하였고,
희(羲)로 하여금 천기(占)의 일을 보게하였고,
우(尤)로 하여금 군대를 조직하는 일을 맏기셨다.
비서갑(菲西岬;창탕고원)의 '하백녀(河伯女)"를 거두어 황후로 삼고
양잠(당시 옥누에 사진 참조)을 다스리게 하니,
넓은 아량과 인자(淳厖)한 치세가 사방에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檀君端拱 無爲坐定世界 玄妙得道 接化羣生命
彭虞闢土地 成造起宮室 高矢主種稼 臣智造書契 奇省設醫藥
那乙管版籍 羲典卦筮 尤作兵馬
納菲西岬 河伯女爲后 治蠶淳 淳厖之治 熙洽四表] * 이하 한문은 삭제한다.
"병진년(丙辰年;BC 424)에 주(周)나라 고(考)임금 때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라고 바꾸고,
백악(太行山脈 碣石山)에서 장당경(藏唐京;북경)으로 옮겼다.
이로서 8조(八條)를 설치하고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일과로 하며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을 가르침(敎)으로 하며
밭 갈고 누에치기(田蠶; 사진 옥누에 참고)에 힘쓰도록 하였다.
어디를 가도 금지 당하는 바가 없고,
죄를 처자에 까지 미치지 않게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사회를 열어,
백성들 누구나와 함께 의논하여 힘을 합처서 나라를 다스렸다.
남자에게는 언제나 직업이 있었고,
여자에게는 좋은 짝이 있었으며,
집집마다 재물이 쌓여있었다.
산에는 도적이 없고,
들엔 주린자를 찾아 볼 수 없었으며,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하였다.
(사진) 고대조선(古朝鮮) <단군 왕검 행차도> - 단군 조선국 건국 의궤(建國儀軌) .
- 산동 2궁 가상현 무씨사당 석실 화상석 (서기 1,786년 산동성 출토).
이 그림은
기원전(BC) 2,333년 단군 왕검께서 조선건국 의궤의 한 부분으로써,
단군 왕검께서 말을 타고 등장하신다.
단군 왕검께서 등장하시면서
야생동물을 가축으로 키우고 땅을 개간하여 경작지로 만들고
새상이 더 풍성해지는 농경문화의 시작을 알리는 그림이다.
(사진) 조선 건국의궤(建國儀軌)에서 단군의 기마행열도.
- 무씨 사당 화상석 일부 단군 기마도, (서기 1,786년 산동성 출토).
(사진) 단군의 조선건국에 협조한 곰(족)과 범(족)의 이야기.
- 무씨 사당 화상석 일부그림. (서기 1,786년 산동성 출토).
(사진) 기원전(BC) 3,500년경 고조선(단군조선) 건국 기념청동기(만주 나만기유적 출토)
- 봉황토템 조이족(배달맑족)이 동이맥족(곰족),만주예족(범족),몽골족(이리족)들을,
흡수하여(휩싸 안고) 통합하고, 단군조선 건국기념 놋허리띠(靑銅腰帶) ,
(사진) 기원전(BC) 3,000∼2,400년 고조선(단군조선) 건국기념 토기 솥.
- 아사달 문양을 그린 '뾰쪽밑토기 솥' (산동반도 출토).
(사진) 기원전(BC) 2,500년경 고대조선 <단군 조선국> 강토.
단군임금(檀君壬儉)은
무진년(戊辰年;BC 2,333) 부터 나라를 다스려서 47세를 전하니
그 역사가 2,096년이었다."
조선국(朝鮮國) 단군임금(檀君壬儉) 계표.
단군임금(檀君壬儉) 47세, 2096년(BC 2,333 ∼ BC 238)
세(世)
|
단군(檀君)
|
즉위년도(한기-B.C)
|
재위기간
|
약 사(略史)
|
1
|
(4865-BC2333)
|
93
|
환웅(桓雄)과 웅족녀 사이에서 임금 태어남.
신인 임금(神人 壬儉)이 무진년(BC.2333) 오가(五加)와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檀木;소사나무)이 자라는 터에 이르러 신시의 옛 규칙을 다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전자(天帝의 아들)로 모시니 구환(九桓)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다. |
|
2
|
(4958-BC2240)
|
58
|
BC 2,239년 천자 부루 3년상.
경술 10년(B.C.2229), 신지인 귀기가 칠회력과 구정도를 만듬. 무술 58년(B.C.2183),단제께서 붕어 하셨는데 이날 일식이 있었다 |
|
3
|
(5016-BC2182)
|
45
|
일명 읍루.
삼랑 을보록이 정음38자(가림토 문자) 제작. 신축 3년(B.C.2180), 신지인 고을이 배달유기를 편수. |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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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1-BC2137)
|
38
|
산삼발견.
갑신 원년(B.C.2137),천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골리한(한은 임금의 뜻)으로 봉하다. |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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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9-BC2099)
|
16
|
양가(羊加) 구을이 즉위.
을축 4년(B.C.2096) 처음으로 육십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듬. |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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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5-BC2083)
|
36
|
우가(牛加) 달문이 뭇 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이음.
육십갑자 사용(BC2096) |
|
7
|
(5151-BC2047)
|
54
|
양가(羊加) 한율이 즉위.
|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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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5-BC1993)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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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牛加) 서한 즉위.
무신 원년(BC 1993) 이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였다. 기유 2년 이 해는 풍년이 들어 벼한 포기에 여덟개의 이삭이 맺혔다. 갑인 7년 세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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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3-BC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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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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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羊加) 정사 2년 청해의 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천제께선 상춘으로 몸을 피하신후, 새 궁궐을 산동 구월산의 남쪽기슭에 창건하게 하셨다.
우지와 우율등에게 명령하여우착을 토벌하여 죽여버리도록 하시고 삼년 뒤에야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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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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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8-BC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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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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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牛加) 노을이 즉위.
신원목(신문고와 같은 역할) 설치(BC1946)병오 16년(B.C.1935), 돔눔밖 십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 줄 모르고, 누워 있던 돌이 절로 일어섰다. 천하에서 거북이(지나에선 황하 또는 발해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팔괘가 그려져 있어 이것이 팔괘의 시초라 하고 삼서성의 낙수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어 이를 하도 낙서라 하는 것이다.)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바로 윳판과 같은 것이었다. 을축 35년(B.C.1916), 처음으로 감성(천문대)을 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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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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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7-BC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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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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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牛加).경인 원년(B.C.1891), 단제 께서는 다섯가(五加)에 명을 내려 열 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였다.
정사 28년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물건들을 모으사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방물을)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 정묘 38년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 20명을 하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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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4-BC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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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牛加) 아한이 즉위.
정해 원년(BC 1834) 무자 2년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아무르) 북쪽에 나타나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수하였는데 요하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 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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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6-BC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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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牛加) 흘달이 즉위. 대음달 하나라 정벌. 무술 50년(B.C.1763),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의 자재로 하여금 글 읽고 활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근화)를 꽃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이라 하였다. 오성취루 천문현상이 관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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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77-BC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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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牛加)고불이 즉위.
신유 42년(B.C.1680) 9월 말라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 닭(봉황)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 을해 56년(B.C.1666),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니 총계1억 8천만인 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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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37-BC1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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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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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음달.경진 원년(B.C.1661) 은나라 왕 소갑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구했다.
이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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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5588-C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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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牛加) 위나가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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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6-BC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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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 20년(B.C.1456), 지백특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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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14-BC1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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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63-BC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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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 54년 지리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을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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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8-BC1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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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가(牛加) 고흘이 즉위.
경자 40년 공공인 공흘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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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1-BC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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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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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 47년(B.C.1291),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 영지 등의 나라를 침공하엿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우현왕은 주변 여러 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신궁에서 즉위 하였다. 단제도 어쩔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전하고 사우여는 폐하여 일반인이 되게 하였고, 단제 께서는 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 하셨다. 이 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국(지나 북평의 옛이름)의 자손들로써 나라를 버리고 동해(발해)만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 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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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3-BC1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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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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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왕 고등의 손자 색불루 무력으로 제위에 오름.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을묘 20년 이 때에 남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엄독골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에 웅거하여 나라를 세워 여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왕성하여 천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의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신미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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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61-BC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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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 원년(BC 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읍을 설치함.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을유 2년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몽골)의 병력을 합쳐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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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37-BC1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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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연나가 즉위하여
황숙 고불가를 섭정으로 삼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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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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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48-BC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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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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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나의 아우.
신해 원년(BC 1150) 정해 37년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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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6-BC1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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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추로가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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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1-BC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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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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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 원년(BC 997) 천해(바이칼 호)의 물이 넘쳐 아란산이 무너졌다.
이해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신묘 8년 큰 가뭄 뒷끝에 큰 비가 쏟아지듯 내려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는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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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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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7-BC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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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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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 18년 빙해의 뭇 가한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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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5-BC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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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 원년(BC 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을유 8년 여름 지진이 있었다. 병술 9년 남해의 조수가 3척이나 물러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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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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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89-BC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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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호타하 북 만주지장)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는 엄독골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한들과 만난 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나라 사람들과도 수교를 맺었다. 병진 5년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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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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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4-BC8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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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 16년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에서 노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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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49-BC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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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 3년 선비의 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
계해 12년 초나라 대부 '이문기'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갑자 13년 3월에 일식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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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79-BC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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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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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 2년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 가죽을 바쳤다.
무자 7년 영고탑 서문밖 감물산 밑에 삼성사(三聖祀)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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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3-BC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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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 10년 두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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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6-BC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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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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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 6년 이 해에 황충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
임오 14년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 임진 24년 큰비가 내리니 산이 무너져 골짜기를 메웠다. 무오 50년 천제께서 '조을'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나라 서울을 돌파하고, 제나라 군사와 임치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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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94-BC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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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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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 28년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무신 32년 서촌의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신해 35년 용마가 천하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더라. 갑인 38년 협야후 배반명[일본 서기는 이사람을 神武王(신무왕)이라며 건국시조로 날조하여 떠받들고 있다.]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에는 삼도가 모두 평정되었다. 무진 52년 천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에 쳐들어 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서 싸워 보았지만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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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52-BC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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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8-BC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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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53-BC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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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9-BC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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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7-BC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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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27-BC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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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7-BC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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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 36년 우화충이 무리 수만명을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시켰다.
백민성 욕살 구물이 장당경을 점령하니 동서의 압록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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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73-BC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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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진 원년(BC 425) 3월 우화충을 죽임.
백민성의 욕살구믈 즉위. 국호를 <대부여>로 고치고 조선을 <삼조선(번조선+진조선+맑조선)>이라고 바꿔불렀다. 무인 23년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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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02-BC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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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 원년(BC 396)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다.
신축 17년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의 군을 침범하매 수비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부수었다. 병진 32년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요서를 함락시키고 운장에 까지 육박해 왔다. 이에 <번조선>이 대장군 '우문헌'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하고 <진조선, 맑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을 숨겨두고 연나라 제나라의 군사를 오도하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남김없이 되찾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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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57-BC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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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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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 46년 '한개'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하니 대장군 '고열가'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고열가'는 43대 단군 '물리'의 현손으로서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받기도 하였고 또 공도 있었던 터라 마침내 즉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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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3-BC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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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 57년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 사람이었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연호를 <고구려>라 칭했다. 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2,096년이라 임술 57년 '고열가' 단제께서 조선국을 폐관하시고 마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었다. |
단군조선 47대 고열가 임금님께서 임술 57년(기원전 295년),
웅심산에서 군대를 일으킨 해모수에게 폐하셨다.
해모수의 선조는 고리국 사람이었다.
그는 <부여>를 세웠다.
단군기원 무진부터 2,096년이라 임술 57년 고열가 임금님께서
조선을 폐관하시고 마침내 치적을 버리시고
산동반도 구월산에 입산 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었다고 전한다.
고려 중엽 산동반도를 잃은 고려사람들이
단군 임금(천제)들을 그리며
산동반도가 보이는 황해도 구월산에 '삼성전(三聖殿)'을 짖고,
"환인", "환웅", "단군" 삼성(三聖)을 모셨다.
고려 삼성전(三聖殿)이 근대조선까지 이어져
삼성(환인+환웅+단군)님을 모신 것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잘 기록되어 있다.
새월이 흘러 헐벗고 버려진 삼성전(三聖殿)을
독립운동가 대종교 창시자 "나철"선생이
일제 때 까지 지키고 있었다.
삼성(환인+환웅+단군)님을 모시고
계속하여 천제(天祭)를 올려 왔지만,
조선의 정기(情氣)를 말살시키려는 일제의 목적에 따라
환단고기 등 옛 조선역사서(朝鮮歷史書) 수십만권을 불태우며
탄압함에 따라 "나철" 선생은 마지막 천제 (天祭)를 올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이르니,
이 때부터 삼성전(三聖殿) 존재 자채가 없어져 버렸다.
더하여 일제는 주춧돌까지 치우고 나무를 심어
삼성전(三聖殿) 그 터와 흔적까지 없애 버렸다.
최근 북한정권이 어느 한 장소를 선택하여
삼성전을 신축하였으나
고증을 참고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도 북한정권이 건립한 '삼성전'이 현존하고 있다.
(사진) 황해도 구월산 <삼성전(三聖殿) > 현존(한국학연구회 제공)
황해도 <삼성당> <중앙>에 모셔져 있는 <환인>천자 영정 - 현존.
황해도 <삼성당> <좌>에 모셔져 있는 <환웅>천자 영정 - 현존.

황해도 <삼성당> <우>에 모셔져 있는 <단군>천자 영정 - 현존.
<삼성전> 삼성당에 모셔져 있는 <환인> <환웅> <단군> 영정이
도인(道人)처럼 긴 수염을 가진 분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홍익인간 조선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위험과 위력을 가진 용맹한 무사 지도자로 상상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이,
청동기 단군시대 도끼 거푸짐에서 찍혀있는
상투 친 <조선사람(古朝鮮人)> 얼굴,이 만주 요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얼굴이 고조선 사람이다.
(사진) 고대조선(단군조선)시대 <놋 도끼(청동 도끼) 거푸집>에 있는 고조선 사람 얼굴(象)
- 요양박물관 소장.
(사진) 고대조선(단군조선)시대 <놋 도끼(청동도끼) 거푸집>의 얼굴을 복원한 <고조선> 지도층 사람.
- 비파형 놋검(청동검)을 든 당시 지도층(장군-군장-부족장-부단군- 단군)의 복원한 모습.
<미안합니다><고맙습니다><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