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許浚)은 침의(鍼醫)가 아니어서 침(鍼)을 놓지 못했다.

2007. 6. 17. 12:19침구의학(첨단의학)

의성(醫聖), 구암(龜岩) 허준(許浚) 등이 편찬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전문(專門) 한의서(韓醫書)가 아니다.
일반대중 누구나 쉽게 시술할 수 있도록 집필한

백성대중들을 위한 대중의서(大衆醫書) 였다.

동의보감은 양반 사대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부모를 모시는 자식들의 필독서로서

백성(百姓)을 위해 만든 의학서(醫學書)였다.

허준은 당시 내의원의 약의(藥醫)로서

침의(鍼醫)가 아니였으며,
'침 놓는 법'을 전문으로 하지 않았고,

당시 왕실 내의원 침의(鍼醫)로는

"남영", "허임" 등등이.... 따로 있었다.

 

(사진) 양평군 구암 허준 상.


조선왕조 '선조실록'에서 허준은 상(선조)에게
"소신은 침 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마는......" 라고 아뢴다.

여기서 조선왕조 '선조실록'을 보자.
선조37년, 1604년 9월 23일
상(왕)이 편두통의 발작으로 침을 맞다.

상(선조)이 이르기를
“침을 맞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허준이 아뢰기를
"증세가 긴급하시니 상례에 구애 받을 수는 없습니다 만,
여러차례 침을 맞으시는 것이 미안하신 듯 하시기에.....
침의들은 항상 말하기를

반드시 침을 놓아 열기를 해소시킨 다음에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소신은 침 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마는.....
그들(鍼醫)의 말이 그러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허임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 낸 뒤에

아시혈에 침을 놓을 수 있다 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상(선조)이 병풍을 치라고 명하였는데,
왕세자 및 의관은 방안에 입시하고

제조 이하는 모두 방 밖에 있었다.
'남영'이 혈을 정하고

'허임'이 침을 들었다.

선조실록에서 상(선조)에게 침을 놓은 의원은 허준이 아니고

"남영"이 혈을 정하고

"허임"이 침을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은 진실을 [TV동의보감]에서는
허준이 약과 침 모두를 시술하는 것으로 외곡하였다.
이와같이 기득권 집단(韓醫師)을 이롭게 하기위한

의식적인 역사외곡은
우리 민족문화와 민족정기를 말살시키려는 문화역적의 예로서

정치역적보다 더 악의적인 처사가 아닌가?

분명 허준은 침의(鍼醫)가 아니었고 약의(藥醫)였고,
당시 내의원에는 침의(鍼醫)약의(藥醫)가 구별되었고,

그들의 업무와 책임도 달랐다.

오늘날도 한의학 영역에서 "한의사"와 "침구사"의

업무영역이 분리 분별되어 진료함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위정자 및 보건복지 관계기관은
반역사적 역적의 어리석은 정책을 펴고 있음이 한심할 뿐이다.

허준은 서자출신 의원으로서
"혜민서" 등에서 백성, 서민 환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에서
당약으로 고치지 못하는 그들 삶의 애환과 질병을 잘 파악했고
그들을 위해서 우리 산야의 약초로 고칠 수 있는
동의보감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레서 허준은 선조의 명을 받아 백성들을 위해 동의보감을 저술했고,
백성들에게도 높은 칭송을 받았다.

또 당시의 어느 기록에도 제대로 나와있지 않은 허준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일반 백성들의 입을 통해 계속 전해지고 있고,
심지어는 살을 붙여가면서까지 허준 신화를 만들어졌던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단서가 바로 백성의술 동의보감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에 기근과 역병까지 겹쳐 국가적인 대비책이 절실했던 1596년,
선조는 내의원 의원들에게
백성들이 쉽게 볼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의서편찬을 명령했다.

 

그래서 동의보감은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고 쉽게 처방 할 수 있는

백성들을 위한 의술로 시작되었다.

선조는 "중국의서는 너무 번잡하기만 할 뿐 참고하기 어렵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처방 가운데 번잡하고 실용성이 적은 것은 버리고
진짜 백성들이 쉽게 쓸 수 있는 처방만 골라

의학의 경전을 정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허준과 그의 동료들은 중국 및 우리 의서 500여권들 중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백성들이 적절하게 처방할 수 있는 것만 골라냈다.
그것을 간추려 담은 것이 백성의술 <동의보감> 25권이다.
거기엔 중요한 고전의서들도 총 망라 돼 있다.

 

또한 처방의 끝엔 반드시 출전을 밝혔고
허준 등 의원들의 실전경험도 덧붙이기도 했다.

 

마지막 허준은 혼자 동의보감을 마무리 할때
그 모든 선택은 허준의 의학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서
당시 의학의 정수만을 가려 뽑고
그의 경험에서 얻은 우리약초와 요법을

백성이면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동의보감>에 담은 것이

불후의 의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탄생시킨 것이다.

<동의보감>이 완성되자,
광해군은 백성들을 위해 그 보급에 나섰다.
전후 형편이 어려웠던 때라 훈련도감 활자로 급히 찍어냈고,
그 후 목판으로도 거듭 출판해 시골의원이나

여러 백성들에게 보급됐다.

광해군은 계속 출간을 격려했고
의료혜택이 부족한 시골의원들과

백성들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1648년에 마련된 강릉의 "약국계 규정"에도
<동의보감>에 관한 내용이 발견된다.

<동의보감>은 편제와 실용성에도 특기할만한 것들이 있다.
급성간염이 전염된다는 것은 최근에 밝혀진 일 임에도.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이미 이같은 사실을 적고 있다.

또 <동의보감>에서 처방하는 주요약재의 90% 정도가
우리 산야에서 생산되는 약초 향약(鄕藥)을 쓰고 있다.
이들 약초는 백성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우리주변의 약재들인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쓰는 약재들의 대부분은 지나(청나라)에서 수입된
"당약(唐藥)" 이라 표시 된 약재를 사용했다.
당시 당약의 약 값은 무척 비쌌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약 한첩 먹을 수가 없었고
죽어가는 목숨이 있어도 여간해선 약을 사먹을 수 없었다.

"만기요람"에서,
당약 중 하나인 '완청'은 한돈(3.7그램)의 가격이
당시 쌀 10말에 버금가는 가격이었다.
같은 중량의 금값보다도 더 비쌌을 정도로 당약은 고가였다.
업친데 덮친 격으로 임진왜란 후 약값이 10배이상 뛰어 올랐고,
심지어 당약은 향약의 270배까지 비싼 것도 있었다.
결국 당시 지방양반들이나 백성들에겐 당약은 '그림의 떡'이었다.

허준은 그동안 써오던 중국약재 당약(唐藥)을 배재했다.
<동의보감> 이후 지방의원들은 대부분 향약을 사용하였고,
백성들도 산야에서 쉽게 체취하여 약재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허준은 <동의보감>에 과감하게 향약 단방처방도 넣었다.
말 그대로 한가지 약초를 써서 치료하는 처방이다.
단방 처방으로 질병을 다스리도록 한
허준의 서민을 위한 생각이 <동의보감>에 반영된 것이다.

여러 가지 약재들을 섞어 고급처방을 쓸 수 없는
대다수 백성들에겐 무엇보다 <동의보감>은 희소식 이었다.
약계(藥契)를 들어가면서까지 부모를 위해 약을 쓸 수 있는

소수 지방호족들 보다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어도 약 한번 쓸 수 없는

백성들을 위한 배려였다.

선조의 명령으로 허준과 내의원 동료들은
약에서 소외되고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하여,
아파도 약 한첩 먹기가 '하늘의 별따기' 였던 백성들을 위하여
<동의보감>의 편찬은 시작했던 것이다.

이름없는 산, 골짝에서 지천으로 널려있는 우리약초들이
약재을 찾은 허준 등 때문에

비로소 귀하게 쓰이는 향약으로서 새이름을 얻고
그 용도가 찾아 진 것이었다.

나라에서는 한문을 모르는 많은 백성들을 위해
여러 한글 언해본 의서들을 간행하기도 했다.
비로서 백성들도 쉽게 의서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허준은 특권층이나 양반사대부를 위해 결코 <동의보감>을 쓰지 않았다.
당약과 의원, 양반, 사대부 등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그 약들이
백성들을 배려하는 허준의 <동의보감>에서

서민들의 향약으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허준의 이런 의학적 성과는 훗날 '제중신편' 이나
이제마의 '사상의학' 등
여러 의학서의 의학적토대가 되었다.
동양의학을 총 망라하는 최고 의학적성과
결코 '의원을 위한 <동의보감>'이 아닌
'백성을 위한 <동의보감>'을 편찬한 허준의 의학정신이
오늘날 '조선의성 허준'으로 더욱 높이 칭송받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