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15. 05:31ㆍ카테고리 없음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든 제산과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목숨까지 받친 <순국선열>님들,
음의 위험속에서 인생의 모든 삶을 나라에 받친 <애국지사>님들,
천신만고 나라는 되 찾았건만
지금까지 위정자들의 친일파 관료기용 정책으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홀대받고 있는 이 사실을
아는가? 모르는가?
내 나라에 받친 내 제산과 목숨,
그 댓과 받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그 때문에 대대손손 무식쟁이, 거렁뱅이로 대우받아서야 되겠는가?
친일후손들이 떵떵거리는 이 나라의 현실에서
수면아래 겨우 헐덕이며 연명하고 있는 순국선열, 애국지사 후손들...
내 나라 독립위해 받친 그 댓과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아직도~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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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1주년] 오희옥 지사 인터뷰.
"친일파 대대손손 호의호식..젊은이들 역사공부해야.
1939년 4월 중국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입대
헌신한 애국지사 후손 여전히 소외된 현실 답답해
일 아베총리 우리나라 못 잡아먹어 안달 이해 못해
젊은이들 역사 많이 읽고 우리 역사 똑바로 알아야
올해로 90세가 된 오희옥 지사는
꽃다운 10대 소녀 시절부터 집안의 내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가가 됐다.
지사의 가계를 살펴보자.
할아버지 오인수는 의병활동으로 용맹을 떨쳤다.
아버지 오광선 역시 만주에서 항일 무장독립운동을 이끈 용장이다.
어머니 정현숙은 독립군 뒷바라지,
언니 오희영과 형부 신송식은 '부부 독립군'이다.
3대가 독립을 위해 생을 바친 것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드문 일이다.




뉴시스는 제 71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오 지사를 만나 가문에 서린 독립의 의미를 물었다.
어린시절부터 오 지사는 조국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명포수 출신인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사냥을 해 가족을 부양했다.
그가 기억하는 할아버지 오인수는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가 큰 천생 장군감이었다.
오 지사는 "할아버지가 더덕을 캐오면 고추장을 발라 온 식구가 둘러앉아 맛있게 구워먹었다"며
"사냥을 잘 해서 고기를 많이 먹었다"고 단란한 한때를 얘기했다.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할아버지는 일본군에 잡혀
서대문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옥고를 치렀다.
8년을 감옥에서 지낸 그는 아들과 손주를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해
또다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11~12살 때인가 중국에 건너가 북경, 남경, 장사 등을 다 다녔다"며
"그때는 아버지가 집에 잘 안 왔다.
일본군으로부터 피신했던 것이다.
어쩌다 어머니가 밤에 혼자서 산에서 올라갔다.
나중에 들으니까 산에서 아버지를 몰래 만나고 왔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오 지사는 "할아버지는 출옥해서 북경 가서 1년 계셨는데 늘 설사를 달고 살았다"며
"감옥에서 워낙 고생을 많이 하셔서 오래 못 사셨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만주에 터전을 잡고 본격적인 무장독립운동에 들어갔을 때에는
어머니가 특히 고생이 심했단다.
오 지사는 "어머니는 하루에 열두 가마니 쌀로 밥을 지어 독립군 뒷바라지를 했다"며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한번도 (아버지가 독립운동을)그만했으면 하는 얘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독립군 모두가 "다 가족"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오 지사는 이런 가풍을 따라 1939년 4월 중국 류저우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했다.
그는 대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연극·무용 등 문화활동을 담당했다.
일본군의 정보 수집과 일본군 내 한국인 사병을 탈출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오 지사는 "14살에 가입해서 무용, 춤, 합창을 했다.
(공연료를 받으면)그 자금으로 중국군에 반, 광복군에 반주고 좀 남으면 생활비를 했다"고 말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오 지사는 아직도 그 당시 무대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
'푸른 하늘 은하수'를 또렷이 기억했다.
이어 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럼없이 한 소절을 불렀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최근 친일파를 처단하는 독립군의 활약을 그려 흥행몰이를 한 영화 '암살'을 재밌게 봤다는 오 지사.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이끈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과
그리고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 애국지사들의 후손들이
여전히 소외되는 현실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아버지는 해방이 됐어도 당당히 독립군으로서 귀국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부녀는 한동안 헤어졌다가 해방 이듬해서야 인천에서 상봉할 수 있었다.
오 지사 조차 해방이 된지 45년이 지난 1990년에 비로소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독립운동에 매진한 뒤 곧바로 6,25전쟁을 만난 오 지사에게 청춘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서른 한 살에 고향인 경기 용인에서 교편을 잡다
비로소 남편(10년 전 별세)을 만나 슬하에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뒀다.
겉으로 보면 그저 '곱게 늙으신' 할머니를 연상시키지만 오 지사는 45년째 고혈압을 앓아왔다.
최근에는 골다공증이 깊어져 골절상을 입기도 했단다.
오 지사는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친일파를 이용했고 6.25전쟁이 나니 모두가 잊혀졌다"며
"행사때 보면 6.25유공자가 맨 앞이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는 네번째 정도 대접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느라 가족을 전연 돌보지 못해서
가난이 대물림되는 현실을 가슴아파했다.
반면 영화 <암살>의 결말과는 달리
친일파들이 대대손손 호의호식하는 현실을 비판했다.
오 지사는 시선을 일본으로 돌려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해서는
"할아버지 때부터 그랬다는데 왜 아직도 우리나라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그는 "일본에도 양심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며
"나라가 바로 설려면 양식 있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끝으로 사드배치, 독도, 동북공정 등 대외적으로 대한민국이 처한 어려움을 열거하며
"젊은이들이 역사를 많이 읽어보았으면 한다.
단군 이래 우리의 역사를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오 지사는 이날 저녁 서대문구(구청장 문석진)가 마련한
'2016 서대문독립민주축제' 개막식에 참석한다.
독립민주인사의 의롭고 험난한 삶의 발자취를 기억하자는 의미로 준비된
'풋프린팅'을 해 우리사회에 독립의 의미를 다시 한번 남긴다.
입력 2016.08.14. 19:15 【서울=뉴시스】손대선 기자 = sds1105@newsis.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