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술(鍼術)의 발명 <한민족문명>

2020. 5. 2. 07:47카테고리 없음

인류와 함께 발전한 침의술(鍼醫術)은

인류 생존에 필요한 질병치료 기술이다.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웅기면(雄基面) 송평동(松坪洞)의 

신석기 시대, 

고대 조선인의 조개무덤(貝塚)에서

서기1923년 8월9일

인류최초의 침 "폄석(貶石)"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돌침 "폄석(貶石)"과 "뼈침(骨鍼)"은

유물번호 석침 제9199호,

유물번호 골침 제8420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보관되어 있다,

 

이것이 고고학적으로 인류사상 최초의 침(鍼)이다.

그러므로 침술(鍼術)의 발원지(發源地)는 고대조선 한반도이다.

 

최근 고고학적 출토 유물 연구에서 서안(장안), 함양, 황하평양 등도

고대조선(환인칸국+환웅배달국+단군조선)의 활동무대로써

<한민족문명>이었던 것이다.

근 발굴되고 있는 홍산문화(靑丘文明) 역시 《고기(桓檀古記)》기록과 상응하는

고대조선(칸국+배달국+조선) 및 대부여 문화로 선명해 진다.

 

BC 3,500년 이전 지나(China)의 서안(장안), 황하평양, 청하호타하(압록,패수),

조하(조선하) 대릉하(대동강)으로 이동한 고조선(환인,환웅,단군)천자께서는

단전호흡 연명장수의 실천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사회를 경영하셨다.

 

고대조선(환인+환웅+단군)천자께서는

천문(天文)과 복술(卜術)을 담당하는 복희(伏犧, BC3,528-3,413)씨를 두셨고,

의식주(衣食住)와 농경(農耕)을 담당하는 신농(神農, BC3,218-3,078)씨를 두셨고,

기술(技術)과 의술(醫術)을 담당하는 헌원(軒轅,BC2,692-2,592) 황제씨를 두셨다.

 

헌원(軒轅)은 고대조선-배달국(밝달국)의 치우(蚩尤) 환웅시대에, 

황하 상류 모퉁이에 거주하던 서장 하족(西藏 夏族)을 관장하도록 파송된 관리였다.

 

치우환웅의 명을 받아 파송된 "헌원"은 서장 하족에 동화되어

서장 하족과 혼인하고 당시 신의술(神醫術)과 신기술(新技術)을

서장 하족에게 전파한 장본인이다.

 

그 후 하족세력이 크지자 헌원은

하족들을 앞장서서 "치우(蚩牛) "환웅에게 반기를 들고 나온다.

'탁록'에서 "치우" 환웅에게 여러번 퍠하여

다시 "치우"환웅의 신하가 되기로 여러번 맹서해 용서를 받았으나,

결국 "치우"환웅을 배신하고 황하서북쪽 모퉁이에서 살금이 하(夏) 나라를 세운다.

이 하(夏) 나라가 지나(支那;China) 한족(漢族)의 최초의 나라가 된다.

 

이 전잰 후

"치우"환웅은 산동성 '우이(牛耳)'로 칩거하여 151새를 살며 

회하, 장강 유역 대륙신라(투후국?) 묘족(苗族)의 수호신이 된다.

 

이 역사적 사실을 사마천은 <사기>에서

"헌원"이 "치우"환웅과 싸움에서 승리한 것 처럼

홀랑 뒤집어 왜곡 기록했다.

 

당(唐)나라의 의서(醫書)

《외대비요방(外臺秘要方) 포박자 의 기록에 의하면

"헌원(軒轅)"은 청구풍산(靑邱風山)에서

스승 진인(眞人) "자부(紫府)"로 부터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황내문경》에는 침구술경전(鍼灸術經典)들로 추정되는 책들로서,

《단군선술(檀君仙術)》 - '만달라 주문 단전호흡'으로 신선을 추구하는 경전.

《천부경(天府經)》 - 우주 창조원리에 따른 침술 기본원리.

《사암경(舍巖經)》 - 고조선(환인,환웅,단군)시대 침 시술 기초서적.

《음양11맥구경(陰陽十一脈灸經)》 - 인체12경맥과 365혈을 기록된 고조선 출토 유물.

 및, 돌침 폄석(貶石), 뼈침(骨鍼)의 폄구처(經穴)가 포함되어 있었다.

 

<마왕퇴> 출토 BC 2,100년경 고조선 침구술 <음양11맥구경(陰陽十一脈灸經)>에는

이때 벌써 <음양11경맥>과 <365경혈>이 확정되어 있었다.

침, 뜸 처방이 현대 침구학과 별반 다른 점이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사진) 세계최초 돌침 폄석(貶石) 과 뼈침(骨鍼)

- 서기1923년 신석기 고조선 조개무덤(貝塚)에서 출토.

-출토지;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송평동 조개무덤(貝塚).

-돌침 폄석(貶石; 유물번호 석침 제9199호),

-뼈침(骨針; 유물번호 골침 제842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침구술 성전(鍼灸術 聖典)으로 추앙받고 있는

속칭 황제내경(黃帝內徑)》과 《영추경(靈樞經)》이,

고대조선(환인,환웅,단군)에서 전래된 의술이란 것을

지나(支那;China) 학자 여러분이 발표한 바 있다.

 

황제내경(黃帝內徑)》 소문 권제4 "이법방의론(異法方宜論)" 제12장에서

“폄석은 동방에서 유래되었다(貶石者亦東方來)” 기록하고 있다.

지나의 최고 지리지 《산해경》에서도

“동방에서 먼저 돌로 만든 ‘폄석’이 생산된다.”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통현지요부》에서는

“요동 동쪽에 ‘폄석’을 이용한 치료술이 발달했다.” 라는 기록들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지나(支那;China)의 고서적의 기록들은

하나같이 '침술의 발상지'가 요동 동쪽 <한민족> 거주지

고대조선(환인,환웅,단군)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사진) 신석기  고대조선(환인+환웅+단군) 시대 뼈침(骨針) 종류.

 

<침(鍼)의 역사와 변천>

[고대 침술(鍼術)]

고대침은 현대침과 용도나 모양이 조금 달랐는데,

고대침은 현대의 수술용 도구와 같은 용도라서

종기를 째는 침,

찔러 고름을 빼는 침,

찔러 피를 빼는 침,

피부자극을 하는 침,

피부 속까지 찌르는 침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인류최초의 침(鍼)은 돌침 폄석(貶石)이다.

폄석은 신석기시대 고대조선(환인+환웅+단군)인들이 사용했던 돌침(石鍼)으로서

돌을 깨고 갈아 송곳이나 쐐기 모양으로 만들어 의술에 사용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는 침의 굵기가 가늘어지고 더 섬세해진,

뼈침(骨鍼), 미세한침(微鍼)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철기시대에 들어서는 청동기시대부터 발달된

고대구침에는 참침(鑱鍼), 원침(員鍼), 제침(鍉鍼), 봉침(鋒鍼), 피침(鈹鍼), 원리침(員利鍼),

호침(毫鍼), 장침(長鍼), 대침(大鍼) 등이 있었다.

 

이들 침도 재료에 따라 금침, 은침, 마형철침(馬銜鐵鍼), 합금침(合金鍼) 등으로 다양해졌다.

또한 침을 담는 침통 역시 사용자의 취향과 휴대에 편리한 모양으로 다양하게 만들어 사용해 왔다.

한단시대(桓檀時代) 한민족은 폄석(石鍼), 골침(骨鍼), 뜸(灸)를 발명하여

지나(支那;China)로 전파된 사실이 있다.

 

기원 후 193년 한나라 혜제(惠帝) 2년 후난성(湖南省) 장사시(長沙市) 동쪽에서 발견된, 

딘군조선 고추가(候;대족장) 이창(利倉)의 묘(廟) 마왕퇴(馬王堆)에서

출토된 유물 《음양11맥구경(陰陽十一脈灸經)》은

BC 2,100년의 단군조선 침술 경맥백서(經脈帛書) 였다.

 

이 지역은 BC 2,100년에 단군3조선-번조선(불조선) 맥(貃)족 거주지 였다.

이 침술 경맥백서에는 팔(臂), 눈(目), 뺨(頷), 인후(咽喉)와 상호연관 된 맥구경이 있고,

“귀의 맥(耳脈; 이침 침자리)”도 표시되어 있고,

11경맥(十一經脈, 즉 足六脈, 手四脈, 任督脈一經)과

폄구처(砭區處), 즉 경혈(經穴)이 현대와 별반 다르지 않게 확실히 정해져 있었다.

 

(그림) 고조선-단군조선 철기시대 구침(九鍼)의 종류.

 

 

[4국시대(고구려,신라,백제,가라) 침술(鍼術)]

 

당(唐) 나라 의서(醫書) 《외대비요방(外臺秘要方)》에서

고구려 의서 《고려노사방(高麗老師方)》,

신라 의서 《신라법사방(新羅法師方)》,

백제 의서 《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이 인용된 기록이 있다.

 

고려 김부식의《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역병(疫病)에 관한 기록이 나와 있는데,

당시의 역병(疫)은 여러 전염병(致病)을 총칭한 것이라 짐작된다.

 

조선시대에 발간한《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 인용된,

김영석(金永錫)의《제중입효방(諸衆立効方)》 옛 의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서(醫書)들이 지금 남아 있지 않고,

우리 후손들이 귀중한 의학 기술들을 잘 발전시키지 못하여

지나(China)로 넘어간 의술이 4국시대에 와서 다시 역 수입하게 된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고구려 평원왕(平元王) 원년(AD564년) 오(吳)나라의 지총(知聰)이

《내외전(內外典)》,《약서(藥書)》,《침구명당도(鍼灸明堂圖)》를 가지고 왔다.” 라고 했고,

《삼국사기 직관지(三國史記 職官誌)》에

“신라 효소왕(孝昭王) 원년(AD692)에 의학(醫學)을 설치하고,

약박사(藥搏士), 침박사(鍼搏士) 2명을 등용하여

《갑을경(甲乙經)》,《침경(鍼經)》,《명당경(明堂經)》등을 가르쳤다.” 라는 기록도 있다.

 

그 뒤 왜(Japan;地平)의 역사서에서

“변기남마(邊畿男磨)가 신라(新羅)에서 침학(鍼學)을 배워

황극천황(皇極天皇) 원년(신라 선덕여왕 11년)에

왜(倭)로 돌아와 침박사(鍼博士)가 되었다.” 라는 기록도 있다.

 

이로 미루어 침술의 발상지 한반도에서 전파된 침구술이

지나(China;支那)에서 발달되고 역수입하는 과정과

다시 지평(Japan;地平)으로 전수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그림) 4국(고구려,백제,신라,가라)시대 청동침통(靑銅鍼筒).

 

 

[고려시대 침술(鍼術)]

 

서기931년 고려 태조 왕건(王建) 즉위13년에 서안(西安)을 방문하고,

그곳에 태학(太學)을 설치하고 의복과(醫卜科;의술과 점술)를 추가 개설했다.

 

서기958년 고려 광종(光宗) 9년에 최초로 과거제도를 시행하였는데,

당시 태학에서 가르친 의술(醫術), 복술(卜術)도 과거로 선발했다.

 

서기981년 고려 성종(成宗) 1년에 군(郡), 현(縣), 주(州)의 수장자재(首長子弟)들을

개경에 모아두고 경제학(經學), 의학(醫學)을 가르쳤고,

12개 지방의 목사(牧使)에게 경제학박사(經學博士), 의학박사(醫學博士)를 파송하여

지방에서 의술(醫術)을 가르치도록 조치하였다.

서기989년 고려 성종 8년에

시어의(侍御醫), 태의(太醫), 의정(醫正), 상약(尙藥), 직장(直長) 등의 의자관직을 두었다.

 

고려 목종(穆宗,재위997~1009)은 왕실에 태의감(太醫監)과 상약국(尙藥局)을 설치하였다.

태의감(太醫監)에는 감(監), 소감(小監), 승(丞), 박사(博士), 의정(醫正)의 관직을 두었고,

상약국(尙藥局)에는 봉어(奉御), 시어의(侍御醫), 직장(直長), 의좌(醫佐) 등의 관직을 두어

황족(皇族)과 황실(皇室)의 질병을 담당하게 하였다.

 

고려 문종(文宗,재위1046∼1083)은 의학제도(醫學制度)를 대폭 확충하여

중앙에는 태의감(太醫監), 상약국(尙藥局), 사선서(司膳署)를 설치하고,

태의감(太醫監)에는 판사(判事), 감(監), 소감(小監), 박사(博士), 승(丞), 의정(醫正), 조교(助敎)의 관직과

주업박사(呪業博士), <의침리(醫鍼吏)> 등의 관직을 두었고,

상약국(尙藥局)에는 봉어(奉御), 시어의(侍御醫), 직장(直長), 의좌(醫佐)의 관직과

<의침리(醫鍼吏)>를 추가로 두어,

약(藥)과 침(鍼)의 진료체제를 갖추게 하였고,

사선서(司膳署)에는 봉어(奉御), 직장(直長), 식의(食醫)의 관직을 두어

관리들의 질병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또한 지방에는 분사태의감(分司太醫監), 판감(判監), 지감(知監)의 관직이 있었고,

오경(五京)에는 유수관(留守官)을 두고,

변방에는 대도호부(大都護部)와 방어진(防禦鎭)을 두고

그 곳에도 의사(醫師)를 두게 하였다.

또한 각 지역에 따라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과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여

약리(藥吏)와 <침리(鍼吏)>를 두어 평민들의 질병치료를 관리하는 기관도 설치하였고,

지방 관아(官衙)에도 의원(醫院)을 설치하여 제사(諸司), 도감(都監), 각색(各色)의

관직을 주어 평민들에게 질병치료를 했다.

 

고려과거제도(高麗科擧制度)는

원래 주(州), 현(縣)의 호정(戶正)이상 벼슬 자제들에게 만 응시 할 수 있도록 했었으나,

의과과거(醫科科擧)만은 신분제를 철폐하여 평민들 자제들에게도 응시자격을 주었다.

 

그 뒤 공민왕 때 의사(醫者) 황정학(黃定鶴)이

“옛 부터 전해온《사암경(舍巖經)》을 재편했다.” 는 기록도 있으며,

공양왕(恭讓王)때

《향약혜민경험방(鄕藥惠民經驗方)》,

《동인경험방(東人經驗方)》,

《진맥도결(診脈圖訣)》등이 출간되었고,

특히《삼화향약방(三和鄕藥方)》은

고려말(高麗末)의 실용의학서적(實用醫學書籍)을 평민들에게까지 넓이 통용되었다.

 

(그림) 고려시대 침통(鍼筒)

 

 

[조선시대 침술(鍼術)]

 

서기1392년 조선 태조(太祖)원년 8월에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을 제정하여

문과(文科), 무과(武科), 역과(譯科), 이과(吏科), 의과(醫科) 등

오과(五科) 별로 인제등용을 실시했다.

그 후 등용의 범위가 문무(文武) 양반제도(兩班制度)로 축소되면서

동반(東班)인 무반(武班)으로 분류됨으로 의과는 무반(武班)에 소속되어

전의감(典醫監), 혜민국(惠民局),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을 설치되었다.

 

서기1393년 조선 태조(太祖)2년에 각 주(州)에 의학(醫學) 교수관(敎授官)을 보내어

의원(醫院)을 설치하게 하였으며,

교수관(敎授官) 밑에 채약정부(採藥丁夫)를 배치하였고,

조선 태조(太祖)6년에 서민의료기관으로 제생원(濟生院)을 신설하였다.

 

서기1405년 조선 태종(太宗)5년에

전의감(典醫監), 혜민국(惠民局),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 제생원(濟生院)을

호조(戶曹)에 소속하게 하고,

교육기관으로 중앙과 각 도에 의학(醫學)과 종약색(種藥色)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태종(太宗)6년 의녀제도(醫女制度)가 실시되어

제생원(濟生院)에서 부녀자의 질병을 돌보게 하였다.

 

조선 세종(世宗)조에서는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유취(醫方類聚)》가 편찬되어

전통민족의학(傳統民族醫學)이 널리 응용되었으며,

세종(世宗)12년 의녀에게 산서(産書)를 가르쳐 산파임무를 겸하게 하였고,

또한 의과과거는 잡과로 분류되고 필요시 부정기적으로 과거를 실시하던 것을

1년에 4회 사맹월(1월, 4월, 7월, 10월)에 정기적인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등용했다.

 

이때 과거과목으로 직지맥(直指脈), 찬도맥(纂圖脈), 직지방(直指方), 화제방(和劑方),

상한유요(傷寒類要), 화제지남(和劑指南), 의방대성(醫方大成), 어약원방(御藥院方),

제생방(濟生方), 제생발췌방(濟生拔萃方), 쌍종처사활인서(雙宗處事活仁署),

연의본초(衍義本草),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성제총록(聖濟總錄), 위씨득효방(危氏得效方),

두씨전령(杜氏傳零), 부인대전(婦人大全), 서죽당방(瑞竹堂方), 백일선방(百一選方),

천금익방(千金翼方), 우마방(牛馬方), 침구경(鍼灸經), 보주동인경(補註銅人經),

난경(難經), 소문(素問) 등 무려 25과목으로 매우 광범한 교육과목이 지정되었다.

또한 침구전문과(鍼灸專門科)를 실시하여 등용한 의원을

전의감(典醫監), 혜민국(惠民局), 제생원(濟生院)에 각각 배치하였다.

 

선조의 명을 받고 광해군(光海君) 5年(1613年)에는

구암(龜巖) 허준(許浚)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저술하였는데,

《동의보감(東醫寶鑑)》은 당대의 약의(藥醫), 침의(鍼醫) 모두가 협동하여

지나(支那;China) 의서(醫書) 82권과 조선 의서(醫書) 4권 등,

총86권의 의서(醫書)를 총망라 하여

동양의학사(東洋醫學史)의 ‘최고의 보물’을 탄생시켰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구암(龜巖) 허준(許浚)을 비롯하여

유의(儒醫) 정작(鄭碏), 양예수(楊禮壽), 김응택(金應澤), 이명원(李命源), 정예남(鄭禮男) 등,

그 외 수많은 의자(醫者)들이 합작 찬술된 의서(醫書)이다.

 

근래에 인기연속극 “TV동의보감”에서

침(鍼)과 약(藥) 모두를 구암(龜巖) 허준(許浚)이 시술한 것처럼 묘사한

역사왜곡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암(龜巖) 허준(許浚)은 약의(藥醫)였지 침의(鍼醫)는 아니었으며,

당시 침의(鍼醫)에는 허임(許任), 남영(南瑩) 등 여러 명의가 있었고,

내의원(內醫院) 역시 침의(鍼醫), 약의(藥醫)의 책무가 분리되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에서도 허준(許浚)이 상(임금)에게 아뢰기를,

“신(臣)은 침(鍼)을 모릅니다 만.....” 란 대목도 나온다.

 

(그림) 조선시대 침통(鍼筒)

 

그 뒤 주명신(周命新)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요약하여

《의문보감(醫門寶鑑)》을 저술하였으며,

강명길(康命吉)은 《제중신편(濟衆新編)》을 저작하였고,

황도연(黃道淵)은 《의종손익(醫宗損益)》, 《방약합편(方藥合編)》을 발간하였고,

이규준(李圭唆)는 《의감중마(醫鑑重磨)》에서 부양론(扶陽論)을 주장하였으며,

 

서기1893년 조선 고종(高宗)30年에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는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에서 독창적인 사상의학설(四象醫學說)을 제창하여

동의학(東醫學)의 미래상을 밝게 하였다.

 

따라서 조선(朝鮮代)의 선비들은

“부모를 봉양하고 효를 행하기 위해서는 선비가 가져야 할 하나의 덕목이 의술"

(事親孝養 儒者之一事醫也)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서는 침(鍼)과 약(藥)이

누구나 전통민족의술(傳統民族醫術)로 보편화 쉽게 시술하였던 것이다.

 

19세기 개화기(開化期) 대원군(大院君)의 쇄국정책(鎖國政策)에도 불구하고

서양선교사(西洋宣敎師)와 함께 들어온 서양의술(西洋醫術)은

“병균을 죽여 질병을 치료하는 새로운 기술의 의술”에 의하여

화농(化膿)과 감염(感染) 및 전염병(疫病)이 쉽게 치유되는 결과를 보고,

조선황실(朝鮮皇室)은 깜짝 놀랐다.

 

특히 김옥균(金玉均)등 개화파의 우정국사건(郵政局事件)으로

칼과 총을 맞은 민영익(閔泳翊)을 염증예방(炎症豫防)과 수술(手術)로 살린

서양의술(西洋醫術)의 위력을 본 명성황후(明成皇后)는

조선의 전통의술을 팽개쳐 버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고관대작(高官大爵)과 권문세가(權門勢家), 양반, 부자, 양민까지

전통조선의술(傳統朝鮮醫術)이 미개인(未開人)의 굿거리로 보이게 되었고,

점차 전통조선의술은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림) 현대 일회용 호침(毫鍼)

 

현대 호침(毫鍼)은 고대구침(古代九鍼)의 하나로서 머리카락처럼 가늘다.

현재는 탄력성이 좋은 합금으로 만든 가는 침을 말한다.

호침은 굵기와 길이가 여러 가지 있는데

침치료 대상으로 되는 대부분의 병에다 쓰인다.

 

굵기가 0.1~0.5mm 되는 것을 보통 쓰며 0.1mm아래인 것도 있다.

길이는 5푼~5치 또는 그 이상 되는 것도 있으며 침자루, 침날, 침 끝으로 되어 있다.

지금 흔히 쓰이는 침으로는 호침(毫鍼), 삼릉침(三稜鍼), 동침(胴鍼), 피내침(皮內針),

수지침(手指針), 전침(電鍼) 등이 있다.

 

환자 살(피부)속에 삽입하는 침들은

완전 멸균된 <일화용 침>만 사용해야 한다.

일회용이 아닌 제사용 침이라면

반드시 <고압멸균기>에서

멸균시킨 후 사용하지 않으면

의학을 모르는 무뇌한 침구인 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