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다완전쟁)>풍신수길 가문의 최후.

2021. 9. 3. 08:29카테고리 없음

<임진왜란>을,

왜인들은 <다완전쟁>이라고 한다.

그 까닭은 당시 조선민가 어느집에서나 수북이 쌓여 있던 '조선막사발'을

대나무 그릇으로 생활하던 당시 왜인들은 보물처럼 탈취해 갔다.

'조선막사발'을 부엌에 수북이 쌓고 살던 조선민가와 농민들의 피해가

그래서 가장 컸었다.

 

당시 <다완전쟁>에 참여한 '명나라'와 '왜의 쇼군' 풍신수길 가문도 무너졌지만 

가장 피해가 컷던 '조선왕조'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선조"보다 "광해군"의 전후 수습 '선진정치'에 있다고 본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왜 열도 전국시대 가장 강력한 '쇼군'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몸종으로서,

겨울신발을 품에 안고 따뜻하게 했다가 "노부나가"가 나올 때 내놓는 충실한 노예였다.

이를 기특하게 본 "노부나가"는 "히데요시"를 가장 측근무사로 중용했다,

 

왜 열도 전국시대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인 ‘혼노우지 변(本能寺の変)’이다.
당시 가장 강력한 '쇼군' "노부나가"를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가 암살한 사건이다.

주군의 원수를 갚으려는 "히데요시"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승리한 유명한 ‘야마자키 전투(山崎の戦い)’ 후

전국의 패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왜 열도를 통일한 "히데요시"는

그 힘을 조선으로 돌려 서기 1,592년 조선을 공격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히데요시"는 다도(茶道)를 미치도록 좋아했다.
당시 왜의 다조(茶祖) "센리큐(一休)"를 스승으로 모시고

조선 막사발을 찻그릇 다완(茶碗)으로 사용하며

다도(茶道)의 경지를 높이니 사람들이 茶마시기를 따라했다.

 

(사진) 왜(일본) 국보가 된 '조선막사발'.


(사진) 풍신수길(豐臣秀吉)이 가장 좋아한 조선 막사발(다완).

 

(사진) 조선 중기 막사발 다완 (강원 철원 출토).

 

"히데요시"는 서기 1,592년 조선을 침공 할 때,

부하 무사 장졸들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조선에는 보물 도자기 다완이 집집마다 부엌에 수북이 쌓여 있다.

먼저 가서 빼앗는 자가 임자다.

어서 가서 가저라.” 라고 선동했다.

 

당시 왜에는 도자기가 없었다.

그들은 나무그릇 대나무로 생활도구를 만들어 사용했고,

옷도 번변히 입지 못하고 천 몇 조각을 걸친 미개한 종족들이었다.

 

그래서 선진문물의 조선을 침공한 일본 무사들은

조선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부엌의 막사발을 싹쓰리 가져갔고,

막사발 도공들까지 잡아갔다.
그래서 왜인들은 <임진왜란>을 <다완전쟁>이라고 불렀다.

 

미개했던 일본이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많은 선진 문물 기술들을 수집해 갔지만

그 중에서 사기그릇 굽는 기술과

화포(대포) 만드는 기술,

신기전 만드는 기술,

귀선(거뷱선) 만드는 기술을 가져 가려고

해 당 기술자들을 무자비하게 끌고갔다.

 

그 중에서 신기전 제조기술과 거북선제조 기술 만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신기전은 당시 조선에서도 숭상하지 않았어 기술자가 부족한 듯 하고.

거북선제조 기술을 조선이 일본에 넘기지 않을 심산으로 

임진왜란 후에는 거북선을 일체 제조하지 않았고

그 제조기술자들도 숭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조선 역시 거북선(귀선) 제조기술이 사라져 버렸다.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조선침략 결과로서,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것은 조선백성들 이었지만,

조선 군주 "선조"는 "이순신"과 "유성룡"같은

훌륭한 전략가 정치가가 있었고,

"광해군"의 선진정치 때문에 왕조가 무너지지 않았다.

반면에 명 나라는 이 전쟁 때문에 나라가 망한 결과를 낳았고,

전쟁에서 패배한 "히데요시"는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가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권력을 빼앗기기 시작한다.

 

"이에야스"에게 밀리기 시작한 "히데요시"는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賴)"에게

'오사카성(大阪城)'을 물려주고,

조선에게 폐배한 충격으로 

서기 1,598년 후시미성에서 광란(狂亂)의 생을 마친다.

 

(사진) 일본 오사카성의 2중 해자.

 

(사진) 일본 오사카성.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자 어린 "히데요리(豊臣秀賴)"

오사카성을 본진으로 삼고 왜를 통치하려고 했다.

 

오사카성은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인 2중의 깊은 해자를 가지고 있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그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는 요새였다.

 

어린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에서 숨어 있는 동안

"이에야스"는 왜 전국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만들게 된다.

세력이 크진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에 있는 "히데요리"도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철옹성 오사카성를 공격하기가 쉽지않았다.

 

"이에야스"는 계략으로 특사를 파견해,
“이제 전쟁을 끝내고 평화롭게 함께 살자.” 라고 속였다.

 

전쟁에 지친 어린 "히데요리"는 이 제안을 반갑게 받아 들였다.

"이에야스"는 "이제 평화롭게 살게 되었으니

해자를 메워서 전쟁 없는 평화시대가 왔음을 백성들에게 보여 주자" 라고

다시 제안해,

군인들을 동원하여 밤새워 오사카성 해자를 매웠다,

 

서기 1,600년 "이에야스"는 세키카아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연이어 오사카성을 함락시켰다.

"히데요리"는 모친(히데요시 애첩)과 함께 자살했다.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에 있던 모든 사람과

"히데요시" 자손들은 단 한명도 남김없이 찾아 죽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씨족들은 어디든 찾아서 죽였으니,

"풍신수길(豐臣秀吉)"은 자신의 가신(家臣)에게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것이다.

 

그 후 일본인들이 "이에야스"가 "화친을 어긴 비급한 짓이 아닌가?" 라며,

사회적 비난이 일자.

"이에야스"는 “세상에 적장의 말을 그대로 믿는 바보가 어디 있느냐?

적장의 말을 대비책 없이 믿는 바보는 죽거나 멸문당해도 싸다!” 라고 했다.

 

● 이 교훈은 우리도 명심해야 한다.

일본인들은 허언(虛言)과 배신(背信)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당연시 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이에야스"가 자신의 주군 "히데요시"를 죽게하고

그의 아들 "히데요리"와 가족 친척 모두를 멸족시키고도?

이에야스는 “세상에, 적장의 말을 그대로 믿는 바보가 어디 있느냐?

적장의 말을 대비책 없이 믿는 바보는 죽거나 멸문당해도 싸다!” 라고 생각한,

일본인들의 의(義)라면,

새상은 약육강식의 황량하기 짝이없게 될 것이다.

더불어 위에서 언급한 일본 다도정신(茶道精神)에도

배려는 전연 찾아볼 수 없다.

결코 일본인들은 밑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란 말 아닌가?

 

(사진) 일본 오사카성의 이모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