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상징 <고인돌(積石廟)>

2021. 9. 7. 13:25카테고리 없음

<고인돌>은 한민족의 삼성(환인+환웅+단군)에게

제사를 올리는 "돌사당"으로서,

한국에서는 고인돌(積石廟)이라 하고,

지평(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라 하고,

지나(중국)에서는 석붕(石棚)이라 하고,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이라고 한다.

 

고인돌은 《고기(桓檀古記)》의 《삼성기(三聖紀)》에 기록되어 있는

한인(桓因)환국, 한웅(桓雄)배달국, 단군(檀君)조선국을 거치면서

기원전 1만년 경 부터 <동이맥족(東夷族)>의 묘(廟)쓰는

독특한 축성방식이었다.

 

고인돌은 조상을 하늘 높이 제사 지내는 돌사당(積石廟)으로서,

땅속에 매장시설을 만들고

땅위에 큰 돌을 윗돌(上石)의 덮개돌(蓋石)로 덮은,

오늘날의 분묘 좌판석과 같은 한민족 특유의 묘(廟)쓰는 양식이다.

 

그 구조와 축조방법에 따라

초기 고인돌, 매립식(埋立式)-남방식,

중기 고인돌, 입석식(立石式)-북방식,

말기 고인돌, 개석식(蓋石式)-좌판식,

적석총 고인돌, 적석총(積石塚)-피라밋식의 4종으로 분류된다.

 

고인돌을 탄소연대 측정치에 근거하면 1만년 전 신석기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한반도 고인돌은 초기 신석기 기원전 10,000년 경 부터 시작하여

초기 철기시대 기원전 200년 경까지 지속되다가 몰락한 것으로 보고 있다.

 

평안북도 증산군 용덕리에 있는 10호 고인돌의 덥개돌 겉면에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11개의 별자리가 80여개가 크기도 다르게 암각되어 있다.

이 별자리를 분석해 보니 BC 3,000~2,800년의 별자리 였다.

이 고인돌에서 출토된 토기의 제작 연대를 탄소연대측정으로 BC 2,900년경 만들어 진 것을 알았다.

 

고인돌의 분포는 지나 중원 평양(平壤), 서안(長安), 함양(咸陽), 산동(山東) 중원 내륙 깊숙히 발견되고,

회하 및 장강 하류 지역에서도 수많은 고인돌이 발견되며,

요서(遼西), 요동(遼東), 만주(滿洲), 몽골(蒙古) 지역과,

지팡(地平,日本), 왜(倭)의 열도 지역과,

중앙아시아 및 유럽의 끝자락 스페인까지,

중앙아시아를 거처 유럽 스페인 북부까지 분포하고,

고조선 유민들이 캄차카-알류산열도로 건너간 미대륙에도 고인돌이 있다. 

측 미국 뉴욕 센트랄파크(중앙공원)에는 여러기의 고인돌이 존재한다.

제주(濟州) 등 여러 섬 지역과, 한반도(韓半島)의 전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들은《삼성기》의 한인(桓因)환국, 한웅(桓雄)배달국, 단군(檀君)조선이

홍익인간 사상으로 다스리던 영향권으로 <동이족(환단족)>의 <한민족문명>이 자리한 곳이다.

이들 고인돌은 한반도 지역에서 세계 총 고인돌의 50%가 분포하고 있지만,

특히 서울 한강유역 춘천 중도와 서울 등지, 황해도, 전라도에 밀집해 있다.

전라도 고창, 화순 지역에 밀집 분포한 고인돌,

황해도 은율 등지,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에서도 흔히 보이는 매립식 초기 고인돌은,

현대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동쪽 한반도에 정착한 후,

농사문화로 전환한 시기, 기원전 9,000년 전의 것으로 보고있다.

 

이들은 농사문화를 이룩하고 대부족으로 형성되자 매립식 초기 고인돌을 만들고

<한민족문명>을 만든 그들이 시원(始原)의 한반도인이다.

초기 고인돌이 밀집한 한반도 이곳이

<유라시아문명> 곧, <한민족문명>의 시원지(始原地)인 것이다.

 

농사문화의 발달로 한반도에 인구가 밀집해 지고

소빙기(小氷期)가 해소되고 기온이 올라가자

매립식 초기 고인돌 세력이 북방으로 이동허게 된다.

북방으로 이동하는 한반도인을 따라

고인돌도 초기 매립식에서 중기 입석식, 말기 개석식, 적석총 고인돌로 진화하게 된다.

 

난하(요수) 및 대릉하에서 호타하(패수)를 지나

지나 중원평양, 서안(장안), 함양으로 진출한 한반도인 맥(貊)족은

기원전 6,000년 이전에 구다천국(독로국, 뒤를 이어 '번조선')을 형성하고,

개량된 잘 다듬은 입석식(立石式) 고인들을 세우고,

거대돌(巨石) 구하기가 힘들어 지자 적석총고인돌(積石塚)로 진화한다.

 

만주, 몽골, 서백력, 송화강 아무르 유역으로 이동한 한반도인 예(濊)족도,

기원전 5,000년 이전에 환국의 비리국(뒤를 이어 '진조선')을 세우고

적석총의 돌사당(石室廟)를 건립한다.

 

(사진) 유럽의 끝자락 스페인 해치네카 고인돌.

-단군조선(고조선)인들이 이곳까지와서 정착한 사실이 언어와 민속으로 확인되고 있다.(신용하 교수)

(사진) 북미 인디안의 고인돌-입석식.

<한민족문명>이 캄차카 알류산열도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간 것을 증명한다.(손성태 교수)

 

(사진)  미국 뉴욕 센트랄파크 고인돌(1)- 초기 매립식(埋立式) 고인돌.

<한민족문명>이 캄차카 알류산열도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간 것을 증명한다.(손성태 교수)

 

(사진)  미국 뉴욕 센트랄파크 고인돌(2)- 초기 매립식(埋立式) 고인돌

<한민족문명>이 캄차카 알류산열도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간 것을 증명한다.(손성태 교수)

 

(사진)  미국 뉴욕 센트랄파크 고인돌(3)- 초기 매립식(埋立式) 고인돌

<한민족문명>이 캄차카 알류산열도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간 것을 증명한다.(손성태 교수)

 

(사진)  미국 뉴욕 센트랄파크 고인돌(4)- 초기 매립식(埋立式) 고인돌

<한민족문명>이 캄차카 알류산열도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간 것을 증명한다.(손성태 교수)

 

(사진) 서울 우이동 고인돌- 초기 매립식(埋立式) 고인돌 - 남방식.

* 고인돌이 서울지역에도 여러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개화기 서울의 주텍건축 석재로 무한정 필요했을 때 고인돌을 파쇄 석재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 고창 고인돌- 초기 매립식(埋立式) 고인돌 - 남방식.

(사진) 강화 고인돌-초기 매립식(埋立式) 고인돌 - 남방식.

 

(사진) 강화 부근리 고인돌-중기 입석(立石式) 고인돌 - 북방식.

 

(사진) 만주 길림 고인돌 - 중기 계량 석식(立石式) 고인돌 - 북방식,

 

(사진) 요서 조양 고인돌 - 말기 제단식 개석식(좌판식) 고인돌.

 

(사진) 집안 <적석총 혼합 고인돌>.

* 고인돌 묘가 적석총피라밋 묘로 전환하는 과정의 <적석총 혼합 고인돌>이다. 

 

(시진) 고인돌의 진화, <적석총고인돌> - 집안 유적지 장군총

 

https://youtube.com/shorts/R12lAUM_91E?si=pAOxkYgR1bkvbhLQ

 

 

 

<고인돌 출토 유물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고인돌 출토유물에는 연마(硏磨)한 돌검(石劍)과 돌화살촉(石鏃)등

여러 종류의 석기, 토기, 청동기 부장품들이 발견되고 있다.

민무늬 토기와 붉은 토기그릇 등과 청동기 유물이 출토된다.

말기 고인돌로 보이는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은

한반도 전국과 중원 및 만주에서도 분포하지만 일본 규슈(九州)지방에서도 분포한다.

그 곳 고인돌 출토 부장품에는 한반도계 유물이 다량 발견되어

한반도인들이 이동한 대군장(고추가)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사진) 전남 화순 고인돌 출토 돌검.

 

(사진) 비파형동검, 빛살무늬 동경, 토기 - 평양 신성동 고인돌 출토.

 

(사진) <천부인>을 연상하게 하는 옥인장(玉印章) - 내몽골 나만기 유적 출토.

 

(사진) 세계 최초 옥결(옥귀걸이) -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출토.

 

 

<신화(神話)로 축소사킨 삼성기 역사>

 

지나(支那,China) <하화족(漢族)>들이 축소 왜곡시킨 <동이족(東夷族)>의 역사는

기원전 약 10,000년 전 부터 천산(天山山脈)과 천해(天海,바이칼호)를 중심으로

12칸국(桓國)을 전쟁없는 홍익인간(弘益人間) 명상선사상(暝想禪思想) 단전호흡 만트라 주문 실천으로

대제국을 형성한 맥(貃), 예(濊), 한(韓)족으로서

한인7대(3,301년 통치),

한웅배달18대(1,565년 통치),

대단군47대(2,096년 통치),

해모수부여/가섭부여, 고구려/신라/백제, 신라/발해,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가진다.

 

한웅배달시대와 대단군조선시대에

길흉화복의 예견을 임명받은 태호(太昊) 복희(伏犧;기원전 3,528-3,413)씨가 있었고,

사약초재배를 임명받은 염제(炎帝) 신농(神農;기원전 3,218-3,078)씨가 있었고,

질병치료와 과학기술을 임명받은 황제(黃帝) 헌원(軒轅;기원전 2,692-2,592)씨가 있었다.

이들 3인은 전설적인 인물들이 아니고

환웅배달국 대단군조선 시대의 실존인물로서 한웅천황과 대단군임금의 신하로서

한 분야의 일을 부여받은 책임자인 동이족(東夷族) 이였었다.

그러나 지나 중원<한족(漢族)> 역사는 이들을 삼황(三皇)으로 추앙하고 있으니,

지나 중원의 역시나 세계4대 황화문명도 결국 대단군 배달민족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이런 광대한《고기》의《삼성기》역사를 사대주의 사상에 휩싸인

고려 김부식《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의《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하화족 사마천《사기(史記)》의 범주 속에서

7대 환인이 통치한 3,301년 역사(BC 7,198 ~ BC 3,898),

18대 환웅이 통치한 1,565년 역사(BC 3,898 ∼ BC 2,333),

47대 단군이 통치한 2,096년 역사(BC 2,333 ∼ BC 238)를

한 줄의 <단군신화(檀君神話)>로 축소시키고 말았다.

 

고려 김부식의《삼국사기》에서

“단군은 하늘 신(天神) 환인의 손자이며 환웅의 아들로,

BC 2,333년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고대조선(古朝鮮)을 세웠다.” 라고 하고,

 

13세기 말 일연(一然)의《삼국유사》제1권조선 조(條)에서,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단군임금이 아사달(아사 땅)에 도읍하고 조선이라는 국호를 썼으니

지나 요(堯)와 같은 시대(기원전 2,333년)다.” 라고,

그 방대한 역사를 단 한줄의 신화적 기록으로 기술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의 고대역사 기록 책 《고기》을 보면,

“환인의 서자(庶子) 환웅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할 때,

환인이 그 뜻을 알고 큰 산(太白) 삼위산(三危山)의 지세(地勢)를 보아

홍익인간(弘益人間)을 펼칠 만 한 곳이라 생각하여 환웅에게 천부인(天府印) 3개를 주어 다스리게 하였다.

*(참고) 삼위산(三危山)은 지금의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현(敦煌縣) 남쪽에 있는 삼위산(三危山).

환웅이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큰산 삼위산(太白三危山) 마루에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신시(神市)를 열고 신령한 위엄(神桓)을 가진 영웅(英雄)들과 세상을 다스렸다.

한웅 말기에 이웃 곰족(熊族)과 호랑이족(虎族)이 한웅족(桓雄族) 사람들과 함께 살고자 하여

한웅은 ‘쑥(藥)과 마늘(蒜) 만으로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고 견딘다면 사람(한웅족)이 될 수 있다.’고

사람 됨됨이를 시험(試驗)하였으니,

참을성 있은 곰족이 21일(삼칠日)을 견뎌내니,

시련을 잘 견딘 웅족녀(熊女)를 간택하여 한웅이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후에 단군(檀君)이 되신 ‘왕검(王儉)’이시다.

 

단군임금께서는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고,

아사 땅(阿斯達)에 도읍하고 1,500년 동안을 다스렸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 권제1, 2장 앞쪽, 기이 2 고조선 조}에서,

왕검이 옮긴 도읍지 아사 땅(阿斯達)은 궁홀산(弓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옮긴 백악산 아사 땅 또 그 이름은 "궁<方이라고도 한다> 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여기서,

옮기기 전, 초기 아사 땅은 어디일까?

옮기기 전, 단군임금께서 도읍한 아사 땅은

고대조선의 어마어마한 적석총피라밋 여러기가 산제하고 있는,

지나 중원의 서안(長安), 함양(咸陽) 지역으로 본다.

 

또한 고대3조선의 번조선이 옮겨간 아사 땅은 황하 건너 평양(平壤) 이었다.

옮긴 백악산 아사 땅의 다른 지명[又名弓<一作方>] 궁(弓)은

황화가 활처럼 휘어진 <일명 方이라고 하는 곳>을 말한다.

이곳은 황하가 활(弓)처럼 둘러 싸고 있는 <중원 평양>이다. (지도를 참고 하시라.)

 

(사진) 궁홀산(弓忽山) 궁(弓), 방(方)으로 첫번째 옮긴 아사 땅은 서안(長安)에서 황하 건너 중원 평양 이었다.

* 번조선 진인이 처음 도읍한 아사 땅은 <서안(長安)>이었던 것이다.

* 진시왕 세력에게 밀려 지나 중원을 내어주고 옮긴 아사 땅은 황하에 둘러싸인 황하북쪽 궁방<평양> 이다.

@(지도보기) 황하가 둘러싸고 있는 궁방<평양>을 찾아보시라.

황하가 활(弓)처럼 둘러싸고 있는 방(方) 모양 지형 금미달(今彌達)이 아닌가?

당시 한반도에는 <평양>이란 지명도 없었다.

한반도에 평양이란 지명이 언제부터 생긴 것인가?

고려시대는 서경, 조선초기까지도 평양이란 명칭을 쓰지 않았다.

일재강점기 지나대륙 평양을 한반도로 끌고와 역사왜곡 목적으로 첩부했던 것이다.

 

이 지역들을 기원전 200년 경 한(漢)나라가 겨우 점령한 <하화족>은

지금도 역사적 유물과 유적을 지우려 하고 있다.

자신들의 떳떳한 역사라면 왜 함구하고 폐쇠하고 지우려 하고 있을까?

동북공정으로 환국, 배달국, 고대조선은 물론, 고구려까지 <한족> 역사로 빨아먹고 있는데.... 

 

왕검께서는 고대조선 건국의 초대 단군(神人)이 되시니,

이 시기는 석기시대를 거처 청동기시대를 아우르고 있었다.

고대조선의 강토는 지나대륙 중원 황화유역을 중심으로 산동, 하북, 요서, 요동 지방과

청구(한반도)와 만주, 몽고, 서백력, 바다건너 지평(地平,Japan)과 왜(倭)의 일부 섬까지

복속되었다는 것은 고인돌 분포와 출토 비파형놋칼(동검), 놋거울 등의 놋기(청동기) 유물들이 말해주고 있다.

또한 여러지역 각처에 흩어져 살며 바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여 남겨 놓았으니,

울산반구대 바위그림 역시 환국, 배달, 고대조선  <고인돌시대> 그림으로 추정된다.

 

(사진) <고인돌시대> 출토 유물, 비파형 놋칼(銅劍)

 

 

(사진) <고인돌시대> 출토 유물, 빗살문양 놋거울(銅鏡).

 

(사진) <고인돌시대> 암각화 (울산 대곡리 반구대 국보 제285호)

 

(사진) <고인돌시대> 암각화 (경북 고령 장기리) - 태양숭배(둥근원) 및 농경지로 보인다.

(사진) <고인돌시대> 암각화 (경북 고령 장기리) - 기념비적 농경문화를 색인 것.

 

 

 

 

 

<미안합니다><고맙습니다><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