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상징 <한복>과 <한옥>

2021. 12. 19. 16:14카테고리 없음

한반도 인류가 지배했던,

고대 중원, 청구 및 만주, 몽골, 한반도, 왜열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고고학적으로 하나하나 분석해 본 결과,

한반도 인류는

구석기(BC. 12,000년 이전) 고대조선(환인 칸국+환웅 배딜국+단군 조선)시대부터

짐승의 털거죽, 누에실 비단(緞) 등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서 청구문명(홍산문화) 유적에서 BC. 3,500년경 

놋거울(銅鏡)을 싼 <비단보자기>와 <누에 고치실>이 출토됨으로 하여,

<한겨레문명>은 청동기시대 이전부터 천을 만들고 옷을 만들어

입었음을 알 수 있다.  

 

<한복(韓服)>이나 <버선;말(襪)> 등도

구석기, 청동기 시대부터 그 특징을 보이고

고대조선(환인 칸국+환웅 밝달국+단군 조선), 해모수 부여, 고구려 시대 등,

동북아 변방족과 다른 특징을 가진 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것은 고구려 및 동북아시아의 고분벽화들에서 잘 나타나 있다.

 

한복(韓服)은 한민족이 발달시킨 고유한 복식으로서

고대조선(환인 칸국+환웅 배달국+단군 조선)을 이어온, 

해모수 부여, 고구려와 3국(신라,가라,백제)으로

1만년 역사를 이어온 한민족 전통의복(傳統衣服)으르서

고유한 한복(韓服) 생활환경을 품고 살았다.

 

(사진) <한겨레문명> 의 고유한 생활환경.

- 멋스러운 골 기와집의 아름다운 창호지(韓紙) 밝은 문창살.

- 정갈하고 깨끗한 남,여 한복.

- 된장, 김치 맛나는 장독 장고방.

- 가을 하늘에 루비같이 조롱조롱 빛나는 빨간 감.

- 이들 모두가 <한민족문명>의 특징적 고유 생활환경이다.

 

 

BC 6,200년경 청구문명(홍산문화) 유물에서

수많은 옥누에(玉簪)가 출토되었고,

고대조선(환인 칸국+환웅 배달국+단군 조선국)시대부터

양잠(養蠶)을 하고 비단(명주)를 짠 직조(織造)물이 출토 됨으로 하여

<한복의 근원>이 확인되고 있다.

 

지나(China) 화하족은

이 시기 대룩의 지도상에 나타나지도 존제하지도 않았다.

 

(사진) BC 6,200~5,200년 고대조선(칸국+배달국+조선국)시대 옥누에(玉簪) 출토(청구문화(홍산문화) 흥륭와).

이 시기 화하족은 존제하지도 않았고

- 고대조선(칸국+배달국+조선국)누에를 키웠고 비단을 짜 비단 한복을 입었다. 

 

(사진) BC 6,000년 경 청동거울 싼 비단보자기와 누에 실.

- 비단 보자기놔 누에 실이 출토됨에 따라

BC 6,000년경 비단 한복을 입은 고대 한겨레인들을 상상할 수 있다.

 

(사진) 비단 한복 입고, 3마리 용이 끄는 용마차를 타고,

나들이 하는 고대조선(칸국+배달국+조선국) 귀족들.

- 미안마에서 그들의 전설을 그린 그림 - 미안마국립박물관소장.

 

(사진) 3마리 용이 끄는 용마차를 타고 가는 고대조선(칸국+배달국+조선국)천자의 행차도 <의궤(儀軌)>. 

- 산동지역 무씨사당 밑돌(苔石)에 그려진 고대조선의 행차도 <조선 의궤(儀軌)의 시원>.

 

(사진) 3마리 용이 끄는 용마차를 타고 가는 고대조선 배달국 환웅 천자.

 

 

BC 4,000~2,000년 청동기 시대부터 한복 입고 상투 튼 고조선(환국+배달국+조선)에 비교하여,

화하족은 고작 BC 250년 경 황하남쪽 양자강 북쪽 일부분을

겨우 통일한 진 나라 시왕이 있었을 뿐이고,

BC 206년 한나라 유방이 천자국 고조선의 도움으로

항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지나(China)를 재 통일한 후

유방은 회하, 장강 이남 만을 정벌하였으나,

동북쪽 천자국 고조선에게 그 은해로 조공을 바쳐가며 한 나라를 세웠다.

 

지나(China;支那)의 지성 들이여!   

생각해 보시라?!

BC. 4,000~2,000년 청동기시대에 축조된 <병마용>과 <적석총>과 <명도전>이,

BC. 250년 철기시대부터 존재했던 진나라/한나라 문화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중공(중국공산당)은 이들 역사를 왜곡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은 중공 정부가 동북아 고대역사를 왜곡하여

동북아 여러 민족들을 식민화 탄압하려는 음모일 뿐이다.

 

(사진) BC. 4,000~2,000년 고조선 사람들이 건립한 청동기 유물만 출토되는

<적석총>과 <병마용>을~.

BC. 250~206년 철기시대 존재했던 <진시왕릉>으로 <진시왕 병마용>으로

왜곡중공 정부와 어용학자들~~. 

 

지나 산서성 장안(서안)에서 진나라 시왕이 BC. 220년경 황하 이남 일부분을 겨우 통합 했을

그 시기,

BC 2,000년 전 청동기 시대부터 이 곳에 살아오던

고조선(환국+배달국+조선) 사람들이 장안,함양의 아사달(서울)에서 밀려,

황하 북쪽 궁(弓)지형 평양으로 1차 천도하게 된다.

 

지나 산시성 린퉁현에 있는 진시왕릉 동쪽 담에서 1.5 km 멀리 떨어진

<병마도용>을 자세히 보세요.

이 <병마도용>들은

고조선 사람들고유 <한복>고유머리 <상투>를 틀고 있지 않는가요?

또한 이 <병마도용>은

청동기시대(BC 3,000~2000년)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젔습니다.

 

BC 220년 경 지나 황하 이남 지역을 겨우 통일한 진시왕의 무덤에

어떻게 BC 2,000년 경에 제작된 <병마도용>이 있단 말인가요?

이 <병마도용>과 <진시왕릉>이라고 하는 것도

고구려식 축성기법 <적석총피라밋 묘>인 것을. . . .

미루어 BC 2/3,000년 청동기시대 고조선(환국+배달국+조선)의 유적, 유물들을

<진시왕 릉>, <진시왕 병마용>으로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공산당 정부가~~~~

 

지금 중공(중국공산당) 당국이

<병마도용>과 <진시왕능>으로 선전하는 거의 모두가

고대조선(환국+배달국+조선) 및 고구려 사람들이 건축한 것으로서,

장안, 함양 주위에 산제해 있는 <적석총피라밋 묘>와 함께 <한민족문명>인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심각한 역사도둑질을 하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중공 정부가 이런 날강도같은 심각한 역사왜곡을 하여 세계적으로 선전해도

<한민족문명>의 후손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어떻게?

왜? 눈 감고 있는가?

 

중공은 역사왜곡에 이골이 나서

고조선의 상 나라 까지 단대공정 및 동북공정으로 자신의 영역으로,

고구려와 백제도 자신들의 영토로 책정한 지도를 만들고 있지 않는가?

그들 욕심대로 자신들의 입맛데로 장대하게 위조 왜곡하고 있지 않는가?

 

상 나라 은 나라를 포함한 고조선(환국+배달국+조선), 해모수부여, 고구려와 3국,

발해, 고려, 조선은 <한민족역사> 이거늘, 

어떻게 중공역사로 편입 왜곡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고 있단 말인가?

역사전쟁을 해야하지 않는가?

 

(사진) 고조선의  청동기시대 '장사상 상투' 튼 도용들 - 서안 출토.

갱은 진시왕 대 것이 아니다.

한민족 고유 '상투' 틀고 '한복' 입은 모습을 보라

이 유적, 유물들은 고조선(환국+배달국+조선)의 장안 아사달(서울) 부장품들이다.

 

 

<한복(韓服)의 역사>

BC 6,000년경 고조선(환국+배달국+조선)시대부터

양잠(養蠶)과 직조織造) 기술이 갇추어져 있었다.

고조선 시대에는 그 기예(技藝)가 발전하여

비단 문화가 사치할 정도로 호화로움을 보여 주고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전(韓傳)에서도,

고조선, 부여 사람들은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고,

베(비단)로 짠 <도포(道袍>)를 입었으며

<가죽신(革蹻蹋)>을 신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대조선 및 부여 사람들은 흰옷을 숭상하여

겉 옷 장의와 바지는 흰 옷을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

나라 밖으로 나갈 때에는 비단 옷과 모직물(絹織物)로 만든 옷을 입었으며,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여기에

'여우'나 '단비'의 검은색, 흰색, 붉은색의 털가죽이 붙은 장의를 입었다.

머리에는 금과 은으로 치장한 갓(幘)를 썼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 한민족 의생활 자료는 매우 적다.

단편적인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인 발굴 자료, 고분 벽화, 도용(陶俑) 등과,

백제 사신이 그려진 <양직공도(梁職貢圖)> 등을 통해 유추해 볼수 밖에 없다.

 

"고대조선 사람들은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치장하기도 하였다.

옷를 잘 차려 입고 갓(幘)을 반듯이 써서 예의 지키기를 좋아했다.

주위 나라에서는 '동방예의지국'이라 호칭하기도 하였다.

신하(下戶)들이 임금(君)에게 조알하러 갈때는

모두 예복과 갓(衣幘)을 마련해 입었는데,

자신의 예복과 갓(衣幘)를 쓴 사람이 천여사람이나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단군3조선의 불조선(弁韓), 신조선(辰韓)  그 전시대 부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농사로 장려하고 있었다.

단과 베를 짤 줄도 알았다.

의복은 청결하고,

장발로 다니지 않고 머리를 틀여 올리며(상투),

폭이 넓고 고운 베를 짜기도 한다”라고 기록하였다.

 

고조선 사람들은 본래 저고리의 깃(동전)과 섶(앞)이 왼쪽방향 여밈의 한복을 입었었다.

오른 손을 많이쓰는 한민족은 깃과 섶이 오른쪽 방향으로 여밈것이 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AD 350년 경에 와서 한민족들은 깃(동전)과 섶(앞) 여밈 방향이

오른쪽으로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그 바뀐 시기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 불교 전래와 함께 오른쪽 여밈 한복을 입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 다음 곧 백제도 불교와 함께 오른쪽 여밈 한복을 만들어 입었고,

신라는 제일 늦게 통일신라 시기에 오른쪽 여밈 한복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복의 모양과 제작형식은 중국복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한민족 전통 한복이 유지되었다.

 

(사진) 깃(동전)과 섶(앞)을 "왼쪽여밈" 고조선 고유한복 - 고구려 고분벽화.

 

(사진) 깃(동전)과 섶(앞)을 "왼쪽여밈" 고조선 고유한복 -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최초 비파 완함(阮咸).

- 완함(阮咸)비파를 다루는 고구려아이돌,  K-Pop의 원조(始元)라고 생각된다.

-백제의 전통악기 월금(月琴)과 동일하다.

 

(사진) 깃(동전)과 섶(앞)을 "왼쪽여밈" 고조선 고유한복 -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수렵도).

 

(사진) 깃(동전)과 섶(앞)을 "오른쪽여밈" 고구려 한복 - 고구려 고분벽화

이 시기부터 깃(동전)과 섶(앞)이 오른쪽여밈으로 바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 4국시대의 고분벽화나 고서기록에서 알 수 있드시,

한민족은 옛부터 저고리(), 바지(), 치마(), 두루마기() 중심의 한복(韓服)을 입었다.

여기에 갓(), 허리띠(帶), 장화(靴), 신(履)를 첨부하였다.

 

유(襦)는 '저고리'로서 상체 한복이고,

고(袴)는 '바지'로서 하체 한복이고,

상()은 '치마'로서 여인 하체 한복이다.

 

여기에 머리에는 책(幘;갓)를 쓰고,

허리에는 대(帶;허리 띠)를 두르며,

발에는 화(靴;장화) 또는 이(履;목없는 신)를 신어 한복의 전통고유형태를 갖추게 된다.

또 그 위에 포(袍;두루마기)를 입음으로서 한민족 예절치례(禮致禮) 전통고유한복을 모두 갖추게 된다.

 

한복 저고리()의 희고 곧은 깃(동전)과 섶(앞)은 본래 고구려 중기까지 왼쪽으로 여미고 있었으나

오른손잡이가 많은 한민족의 편리성 때문에 오른쪽여밈 깃-섶으로 변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사국시대 말기 한민족의 오른쪽여밈 한복은 소매는 좁고, 길이져 엉덩이까지 내려오고

종아리 위까지 긴 신라의 '장유도'는 고구려와 백제도 같은 모양 이었다.

저고리는 오늘날의 승복 ‘동방’과 비슷한 모양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허리띠(帶)를 둘렀는데,

특히 깃(동전), 섶(앞), 소매 끝에는 색 다른 천으로 둘러 편리성과 미적 감각까지 높혔던 것이다.

 

(사진) 통일신라 후 한민족 전통한복 저고리()는 "오른쪽여밈"

 

신라에서는 저고리()를 '위해'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저고리를 '우티', '우치'라고 하는 말과 연관된 것이다.

 

'저고리'라는 표현은

서기1420년 조선 세종 2년 원경왕후(元敬王后) 선전의(選奠儀)에 '적고리(赤古里)'라고 나온다.

바지(袴)는 용도에 따라 폭과 길이의 변화가 있었다.,

폭이 좁은바지(窮袴)와 지금의 한복 바지와 같은 넓은바지(大口)가 있었고,

오늘날의 잠방이와 같은 가랑이가 짧은 곤(困)이 있었다.

좁은바지(궁고)는 곤(困)과 더불어 민층의 하의였고,

넓은바지(大口)는 상류층의 하의였는데,

발목을 대님(帶)으로 묶기도 하였다.

이 바지를 신라에서는 '가반' 또는 '가배' 라 하였는데,

지금 우리말의 '고의', '고쟁이'도 이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바지'라는 표현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인지가 '파지(把持)'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지'라는 호칭은 당시 이미 널리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당시는 여자도 바지를 입는 것이 기본 의복이였기 때문이다.

 

치마()은 여자 전용의 하의로서

여인들은 바지()와 치마()을 혼용하였다.

 

치마()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길이가 길고 폭이 넓어 땅에 끌릴 정도였으며,

허리 부분부터 자락 끝까지 잔주름이 잡혔고,

다시 치맛자락 끝에 일종의 장식연,

곧 선을 둘러 조선시대의 스란치마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상(裳)을 치마로 표현한 첫 기록은

원경왕후 '선전의'에서 치막(侈膜) 적고리(赤古里)가 나온다.

한글로는 사도세자의 빈 혜경궁 홍씨의 《한중만록》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두루마기()는 바깥옷(表衣)를 뜻하는 것으로서,

당시에는 저고리()와 바지() 위에 착용하여 외투의 성격으로 입었다.

오늘날의 두루마기에서와 같이 직령, 교임, 중거형의 것이 아니고

직령, 교임, 직수형의 것이었으며,

여기에 띠를 둘렀다.

이 두루마기()를 당시에는 왕,공 이하 평민에 이르기까지 남녀가 모두 보편적으로 착용하였다.

 

포()를 가지고 두루마기라 한 것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옷의 폭을 쭉 돌러 다 막았다는 데서 나온 순수한 우리말 표현이다.

 

이러한 한복의 기본형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없다.

다만 관복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흡수 사용함으로써

고려, 조선시대까지 그 제도를 준용하였다.

 

중국과 한국은 정치, 문화 교류를 통하여 양국의 복식도 서로 영향을 끼쳤는데,

신라의 경우는 반중화, 배당을 비롯하여 여자 포제로서의 활수의, 색사대가 그것이다.

 

고려 제25대 충렬왕 이후 원나라의 사위국(부용국)이 되면서 복식 풍습도 몽골풍을 많이 따랐는데,

질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으며,

제31대 공민왕 때 원나라가 쇠망하고

고려인 주원장의 명나라가 다시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몽골풍은 사라졌다.

그러나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가 좁아진 것은 몽골 복식의 영향이며,

이로 말미암아 저고리 띠가 없어지고 대신 고름을 달게 되었다.

또 여자 화관 족두리는 몽골인의 고고리로 보인다.

 

조선시대 임진, 병자 두 병란을 겪으면서

한민족의 자각심이 일기 시작하여 민족 복식을 다시 형성한다.

여기서 두드러진 것은 남자의 포제와 입제이며,

여자의 예복과 친의류이다.

 

남자의 포제는 포(두루마기)의 기본형에서

고려의 백저포를 거쳐 직령→ 도포 → 창의에서 조선 말기의 주의로 발전한다.

입제는 평량자 → 초립, 흑립으로 발전한다.

여자의 예복은 중국의 활수의, 색사대에 속한 적의, 대삼 등이

원삼, 활옷, 당의 등으로 한민족 고유의복이 되었고,

친의류는 단속곳, 바지 또는 고쟁이, 속속곳, 다리속곳, 너른바지 등으로 다양해진다.

 

그리고 조선 말 개화기에는 양복, 양장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한복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져 갔다.

 

[자료] 광장시장 조선명주(한복의 역사와 유래)

 

(사진) 현대 한복의 아름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