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 16. 12:04ㆍ카테고리 없음
"이순신(1545년(인종1년)~1598년(선조31년)"은 덕수이씨(德水李氏)로
휘(諱)는 "순신(舜臣)"이고, 자(字)는 "여해(汝諧)"이다.
부친 "이정(李貞)"과 모친 초계 "변"씨 사이에 한양 건천동(지금,서울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세종조(世宗朝) 대제학(大提學) 정정공(貞靖公) "이변(李邊)의" 5대손이다.
서기 1,576년(선조 9년)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이후 발포수군만호, 훈련원참군, 전라도의 조방장, 선전관 등을 역임하고,
서기 1,589년 정읍 현감이 되었다.
이어 만포첨사, 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그림) 조선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
서기 1,592년 4월14일 왜적군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경상우수사 "원균(元均;1540~1597)"으로부터
왜적선 350여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받고
"이순신"은 서기 1,592년 5월 4일 85척의 선단을 이끌고 출전한다.
3일 후, 5월7일 옥포 앞바다를 지날 무렵
정박중인 왜적선을 발견하고 이를 공격하여 왜적선 26척과 많은 왜적군을 섬멸시켰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이순신"장군의 최초 해전이다.
같은 해 5월 29일 "이순신" 장군은 23척의 전선으로 '거북선'을 앞세우고 여수항을 출발하여
왜적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에서 바다로 유인하여 왜적선 12척을 파괴하고
왜적군을 궤멸시켰으나 자신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관통되는 큰 전상을 입는다.
이를 <사천대첩>이라 한다.
같은 해 6월2일 왜적선이 당포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그곳으로 진격하여
거북선을 앞세우고 맹렬한 공격을 가하고 왜적장 "구루시마"를 죽이는 전과를 올린다.
그해 6월5일 아침 거제로 향하다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李億祺,1561~1597)" 함대를 만나 연합함대를 구성하고
"이순신" 장군은 왜적의 선단이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를 듣고 바로 그곳으로 진격하였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왜적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왔다.
아군의 전선들은 왜적선을 포위하고 '거북선'을 먼저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적군은 대패하여 왜적선 모두를 섬멸시켰다.
이때 왜적수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시키고
견내량에 대규모 전선을 정박시키고 있었는데 "이순신" 장군은 이를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견내량 지형이 좁아 활동이 불편하자 "이순신" 장군은 약간의 판옥선으로 왜적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쳐 일제히 총통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총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이 <한산도대첩>이다.
(그림)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 기념조형물(통영시 제작).
이 <한산도대첩>으로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순신" 장군은
왜적의 침입 교두보인 부산포 공격을 결심한다.
전라좌우도 연합함대가 좌수영을 떠나
서기 1,592년 9월1일 오전 절영도에 이르러 부산포의 적정을 탐지한 결과,
왜적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정박해 있음을 알았다.
왜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이순신"장군은 독전 깃발을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다.
이에 우부장 정운(鄭運;1543~1592) 등이 선두에 서서 바다로 나오는 왜적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여 종일토록 백병교전하여 적선 100여척을 파괴 괴멸시켰다.
이 해전을 <옥포대첩>이라 한다.
서기 1,593년 8월 조정에서는 "이순신"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다.
서기 1,594년 명나라 병력이 참전하게 되고,
"이순신"장군은 죽도로 진을 옮기니,
왜적군이 서해안으로 진출해 조선의 경인지방에 대한 왜적 수군의 직접공격과
명나라 동해안 공격작전을 사전에 막는대 큰 역활을 헸다.
그 뒤 "이순신" 장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과 왜적 사이의 비밀 강화회담은 진행되었고,
패전상태로 돌아선 왜적군 일부가 왜국으로 돌아갔다.
왜적의 완전철군을 요구하던 조선조정과 "이순신' 장군의 요구로 서기 1,597년 강화회담이 깨어지자,
왜국으로 돌아 갔던 일부 왜적군이 다시 충전하여 침입하니 이가 곧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서기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한 이때, "이순신" 장군을 제거하려는
'왜적 및 명군의 공동모략'과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 장군은 억울하게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그 콩고물로 "원균"은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을 대신하게 되었다.
한양으로 압송된 "이순신" 장군은 가혹한 고문을 받아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으나
우의정 "정탁(鄭琢;1526~1605)"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權慄;1537~1599)"의 막하로 들어가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하게 된다.
한편,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서기 1,597년 7월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에서 대패하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장군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통제사에 재 임용된 "이순신"장군은
서기 1,597년8월15일 12척의 전선과 패색짙은 부상당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 해역에서 133척의 왜적군을 조수 역류힘을 이용하여 왜적선 31척을 파괴시키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은 조선수군과 성웅(聖雄) "이순신"장군은
'보화도(목포 고하도)'를 본영으로 삼았다가
다음해 서기 1,598년 2월에 '고금도'로 본영을 옮겨
왜적군의 서해안 진출을 막아 경인 및 한양 도성 공격을 막아 조선조정을 구한 것이다.
서기 1,598년11월19일,
"이순신"장군은 퇴각하기 위하여 노량진에 집결한 왜적선단 500여척을 발견하고
수십명의 용감한 조선수군으로 맹공을 가하여 왜적군 수만명을 사상자시키고
왜적선 수백척을 파괴 섬멸시키는 왜란 최대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선두에 나서서 군사를 지휘하던 "이순신"장군도 왜적의 조총탄에 맞아 전사하시었다.
장군은 갑옷을 벗은 체 독전하는 행동이
당시 당파로 퇴락한 조정의 음모에 희망을 잃어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간악한 간신들을 분별하지 못한 군주 최고지도자를 모신 백성들의 애석하고 애닲은 비참한 삶이었다.
"이순신"장군의 전사소식을 접한 썩어빠진 조선조정과 용열한 선조는 뒤늦게 관원을 보내 조상하였으나,
그들과 그가 어떤 어리석은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았을까?
죄없는 수십만의 백성들이 처참히 죽고 삼천리 강토가 유린당한 통분을 알았을까?
이러한 형태의 실상들이 현대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우리의 대통령 최고지도자 한 사람을 잘 못 선정하면 나라가 천량벼량으로 떨어져
백성들이 시대의 가난과 궁핍으로 힘겹게 살아 갈 수 밖에 없다.
정직한 바른 사고방식을 가진 최고지도자 한 사람이
그 민족에 미치는 영향이 흑백좌우를 뒤집는 것 같이 뭇 백성의 삶과 생사가 달린 것이다.
(사진) 조선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전몰하신 노량진(경남 남해 고현면 관음포).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을 전장에서 죽음까지 결심하게 만든
당시 조선 조정의 당파대립과 아둔한 선조인금의 의심병?
그러나 장군이 가신 후 조선수군에 큰 공백이 생겼지만,
조선과의 전쟁 패전으로 발생한 풍신수길의 질병악화로 왜적들은 긴급히 물러갔다.
어리석은 선조는 서기 1,604년 늦었지만 "이순신"장군에게 '선무공신1등'에 녹훈하였다.
그 뒤 '우의정', '덕풍부원군'으로 추봉하였다.
서기 1,793년 정조 17년에 다시 '영의정'으로 추봉되었다.
장군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장군은 통영의 충열사(忠烈祠), 순천의 충민사(忠民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배향되어 있다.
(사진) 조선을 구한 "이순신"장군 묘소(충남 아산시 음봉면, 사적 제112호)
(사진) 조선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품(경남 통영시 명정동 충렬사 팔사품, 보물 제440호).
(사진) 조선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글씨와 휘.
(그림)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이 상 "선조"께 보낸 전서(戰書).
(사진) 조선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 초상화 화폐(한국은행 발행).
(그림) 조선을 구한 "이순신 거북선"을 복원한 철갑선(진해 해군사관학교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