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조선(古朝鮮)의 흥망사(興亡史).

2022. 2. 23. 17:31카테고리 없음

고대조선(古朝鮮)은 환인환국, 환웅배달국, 단군조선으로 이어왔다.

단군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BC 700년 경 저술된 《관자(管子)》에서

'맑조선(馬韓,말조선)’이

산동반도 제(濟)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서 부터이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신조선(辰韓;진조선)'이

발해만(渤海灣)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당시 단군3조선은 맑조선+신조선+불조선의 통합조선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불조선(번조선)'은 지나(China)의 장안(서안), 함양을 중심으로 산동,하북,요서에 자리했고,

'신조선(진조선)'은 몽골, 서백력, 아무르, 연해주, 캄차카(다리타국), 오호츠크(옥저)까지 뻗어 있었고,

'맑조선(말조선)'은 만주, 요동반도, 한반도, 규수, 본슈, 유구, 태평양 여러섬 지역까지

그 영역을 펴고 있었다.

 

당시 이 일대에는

고인돌 묘, 비파형놋칼(琵琶形銅劍), 빗살무늬토기, 명도전(明刀錢) 문화를

공통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단군3조선 연합나라로 뭉쳐 있었다.

 

'번조선(불조선)'은 지나대륙(支那大陸)의 장안(서안)과 함양 땅에

처음으로 아사달(서울)을 세웠다.

당시 지나(중원)의 전 지역은 '번조선(불조선)'의 영역이거나 제후국(諸侯國)들 이였다.

그래서 천자국 <조선(朝鮮)>과 같은

두개글자(二字)로 나라 제후국 이름을 칭하지 못하게 하여,

한개 글자(一字)로 만 칭하게 하니,

당시 지나(중원)의 여러 제후국들은 한개 글자로 나라 이름을 만들게 하여,

하(夏), 주(周), 연(燕), 진(秦), 한(漢), 제(齊), 월(越) 등 외자로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지나(중국) 전통의 외자 나라 이름으로 고착되는 이유가 된 것이다.

 

지나(중원)의 제후국들 세력이 점차 커져가서

군웅활거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시작되니,

하(夏), 주(周)를 비롯해 각 지역의 제후국들이 왕(王)이라 칭하기 시작하고

천자국 단군3조선-번조선(불조선)에 반기의 뜻을 피력하니

이때부터 전쟁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참다 못한 단군3조선-번조선 진인부단군(眞人副檀君)이 군대를 동원하여

불순종하는 연(燕)나라부터 먼저 치려했다.

 

당시 예(禮) 대부(大夫)가 진인부단군께 아뢰기를,

"지금까지 만 백성을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싸움없이 잘 다스려 오셨는데,

이제와서 진인부단군께서 먼저 전쟁을 일어키시면 아니되시옵니다.

예전처름 덕(悳)으로 교화시키시어 홍익인간을 펼쳐 주소서."라고 만류하여

단군3조선-번조선 진인부단군께서 전쟁을 그만 두기로 하셨다.

 

이렇게 단군3조선-번조선(불조선)은 BC.400년 경 무렵부터

전국칠웅(戰國七雄)에게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 전국칠웅들 끼리 각축과 전쟁을 이르켜 대립이 그치지 않았다.

당시 지나(중국)인들은 교만하고 잔인한 싸움으로
강력한 나라 체제로 갖추어 나갔으나,

천자국이 었던 단군3조선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덕(悳)으로 뭇 백성들을 교화시키려 하고 있었다.

인율(仁律)을 배우지 못한 지나족(夏族,華族)들은 

신무기 '철기' 의 개발로 정복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쇠칼(銕劍) 신무기를 들고

'황하'를 넘어 천자국 단군3조선-번조선의 한 부족

동호족(東胡族) 땅에 쳐들어 왔다.

황하를 처음 넘어온 연(燕)나라는

호타하(浿水) 서쪽에 요서군(遼西郡)을 설치하고

그 때 장새(障塞)를 튼튼히 쌓았다.

단군3조선-번조선은 서방 1,000여리의 동호땅을 상실했으나,

어니하(於泥河;靑河;冽水) 하류지역에서

서북 수성진(貴州)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이 지역 일대인 만번한(滿潘汗)을 경계로

연(燕)나라와 대치하였다.

 

만번한(滿潘汗)은 패수(浿水)인 '호타하'이다.

당시  '난하'를 '대요수'라 했으니 

'요서군'은 서수현과 조선하(朝鮮河)가 있는 북경지방이고,

'요동군'은 '난하(대요수)' 동쪽지방이 된다.

 

일부 강단사학자들도,

'서수현' '수성진'과 태행산맥 '갈석산(碣石山)'에서 흐르는

<호타하>가 <패수(浿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호타하> 동북쪽 조선하(朝鮮河)가 흐르는 북경일대가

<고조선>의 <요동지방> 임이 확실해 졌다.  

<요동>은 조하(朝鮮河) 유역에 고구려의 각종 성곽,

즉, 그 유명한 <안시성>, <요동성> 등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한4군(漢四郡)설이 위서(僞書)이거나,

존재하였다면?

이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지나(China)의 연나라, 한나라 등

어떤 세력도 고려, 조선 시대까지 '장성(만리장성)' 산해관을 넘지 못했다는 것이

동북아 고대역사의 팩트이다. 

 

(사진) 연 나라 장수 '진개'가 황하를 넘어 동호지방에 성을 쌓은 호타하(浿水)의 수성진(貴州).

 

(사진) BC 300년까지 단군3조선-번조선은 황하<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다.

BC 230년경 연(燕)의 장수 진개(秦開)가 황하를 건너 처들어와

단군3조선-번조선은 동호 땅 일천리를 잃었다.

 

BC 222년 지나 황하 남쪽에서 진(秦)나라가

연(燕)나라를 멸망시키고 지나를 통일하자.

단군3조선-번조선(불조선)은 호타하(패수)와 난하(대요수)사이

<수성진 요서군>에 군사력을 강화시킨다.

 

단군3조선-번조선 부(否) 진인(眞人)은 어리석게도 진(秦)나라 공격이 두려워서

"진(秦)나라에 복속해 줄 것을 청하였지만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을 거부하여

복속이 불발되었다."는 거짓 기록도 있다.

 

단군3조선-번조선 부단군(副檀君)이 죽고 아들 준(準)이 부단군에 즉위할 무렵

진(秦)나라에서 유방(劉邦), 항우(項羽)의 내란으로 진(秦)이 망하고,

기원전 206년 유방(劉邦)의 한(漢)나라가 지나(중국)를 통일하였다.

 

유방이 항우에게 승리하기 위해 천자국(天子國) 단군3조선-번조선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군3조선-번조선의 제후국 연 나라 군대를 파견하여

유방이 항우에게 승리하도록 도와 주었다. 

이로 인하여 유방(劉邦)의 한(漢)나라는

진(秦)나라처럼 단군3조선-번조선을 건더리지 않았다.

오히려 한(漢)나라는 단군3조선-번조선에게 조공을 받쳤다.

 

BC 195년 단군3조선-번조선 제후국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漢)에 대적하다 폐하고 흉노(匈奴)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燕)의 유민들이 단군3조선-번조선으로 많이 이주해 왔다.

당시 단군3조선-번조선 제후국 연 나라는 청하(冽水)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위만(衛滿)’이란 사람이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상투를 치고 한복을 입고 조선사람처럼 번장하여

단군3조선-번조선으로 이주해 왔다.

 

단군3조선-번조선 '준' 진인(부단군)은 '위만'을 신임하고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남쪽 1백리 변방 땅을 관장하게 하고 축성과 수비 임무를 맡겼다.

BC 194년 '위만'은 자신의 세력을 모아 "한(漢)군이 처들어 온다." 는 헛소문을 내고

단군3조선-번조선의 '준' 진인을 좇아 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쫒겨난 단군3조선-번조선 '준' 진인은 뱃길로

한반도 군산으로 가서 한 부족의 왕 역할을 했다.

요서지방(지금의 북경지역) '단군3조선-번조선'은

이 때 부터 ‘위만조선(衛滿朝鮮)’이라 부르게 된다.

'위만'은 연 나라 유민집단과 토착 단군3조선-번조선 맥(貃)족 사람들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족장 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한 하족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약소한 세력을 흡수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가 북쪽의 단군3조선-진조선(辰國)과

한(漢) 나라가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찾이하려 했다.

이에 불만을 느낀 단군3조선-진조선 예(濊)족

남려(南閭)는 한(漢)과 협력하여 직접 통교한다.

 

이즈음 부터 한(漢)은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여

위만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킨다.

위만조선은 한(漢)과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漢)은 BC 109년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위만조선의 아사달(조양)을 공격하였고,

위만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위만조선 지배층도 내부분열과 일탈이 나타났다.

 

위만조선의 상(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호를 이끌고

동북쪽의 단군3조선-진조선(辰國)으로 이주해 갔다.

또 위만조선 상(相) 로인(路人),

위만조선 상(相) 한음(韓陰),

위만조선 니계상(尼谿相) 세 사람과,

위만조선 장군(將軍) 왕겹(王唊) 등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위만조선의 3대 '우거' 진인이 살해되고

황자(皇子) 장(長)까지 한군(漢軍)에 투항하게 된다.

그러나 위만조선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아사달(조양)이 함락되고 말았다.

 

한무제는 난하(대요수) 동쪽 요동지역(조양지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4군을 설치한다.

당시 한무제도 <산해관>과 <영성>을 잇는 산맥을 넘지 않고

한4군을 설치했던 것이다.

 

이 시기 진평군 및 요서지방에 살고있던

단군3조선-번조선 사람들과 유민들은 

산동반도 자역에  '소서노'의 큰아들 '비류'가 세운 <대륙백제>에 합류하고,

회하, 장강 유역에서 살던 묘족과 후이족, 번조선 유민들

한무제 힘에 밀려 흉노족(룬족;스키타이족) 투후국의  <대륙신라>로 이주하게 된다.

 

위만조선이 한(漢)나라 '철기군'을 맞아 약 1년 동안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단군3조선-번조선도 강철 무기개발과 이를 기반으로 한

기마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단군3조선 후기에는 강철무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도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단군3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여러 신진세력의 통합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각 지배집단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려 했고,

단군3조선 정권의 홍익인간 사상의 구심력이 약화되면서

중앙정권으로부터 이탈을 꾀했다.

 

단군3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과 홍익인간 사상의 약화로

결속력이 취약하여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홍익인간 사상이 퇴락한 단군3조선에서

이때부터 <조선8조법>을 창제해 통합 해보려 하였지만,

한번 갈라진 계급, 권력을 맛본 사람들은 사유재산제, 신분제 사회로 형성되어 갔다.

 

지금까지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 연조(燕條)에 전하는

<조선8조법>중 3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相殺, 以當時償殺).

② 남의 신체를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보상한다(相傷, 以穀償).

③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소유주의 집에 잡혀가 노예가 됨이 원칙이나,

자속(自贖)하려는 시람은 (명도전) 50만전을 내놓아야 한다.

(相盜, 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人五十萬錢).

 

이러한 단군3조선의 법조항은 위만조선이 망하고

진조선, 맑조선이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에 그 내용이 더욱 복잡한

<조선60여조법>으로 늘어나

<홍익인간 사회>가 <금력 권력사회>로 변천해 감을 알 수 있다.

 

*이로서 홍익인간 사회가 부(富)와 권(權)에 물들기 시작한 것이

<한민족문명>이 소국의 길, 소민족의 길, 쇠퇴의 길로 간 이유로 판단된다.

 

그 후 단군3조선-진조선에는

'해모수'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북부여>로 다시 태어난다.

단군3조선-맑조선에는 진조선, 번조선에서 몰려온 유민들에 의해

다시 삼한(後三韓;마한,진한,변한)으로 분열 재편된다.

 

중원 황하 북동쪽 단군3조선-번조선 청구(靑邱) 청하(靑河)지역에서 

해모수 후손 추모(주몽)왕이 부여에서 나타나 고구려를 재건하고

한4군의 땅을 점차로 흡수하고

황하북쪽에서 몽골,만주지방까지 고구려 대제국을 형성한다. 

 

단군3조선-번조선의 고토(古土) 진평군, 요서지방과 산동반도를 중심한

'비류'의 나라 '대륙백제'와

한반도 한강유역 송파와 하남 위래성에 중심을 둔 '온조' 세력은

송파나루(지금의 석촌호수)를 중심으로 황해와 남중국해를 넘나들며,

해외22담로를 설치한 해양 대제국 한성백제를 이룩한다.

 

고조선-배달국 환웅 치우천자의 직계후손 "후이족"과 "묘족"은

단군3조선 시대부터 회하, 장강 유역에서 '대륙신라'를 이루고 살다가

'대륙신라'가 수나라의 중원통일의 압력에 밀려서

왕족과 귀족들이 한반도 동해안 서라벌(경주)과 사라국(김해)로 이주 해 '후기신라'가 생긴다.

 

(사진) <회남자> 기록에 의한 단군3조선 위치.

- 지도에서 표시된 <패수(浿水)>는

동쪽으로 흐르는 <청하(靑河;冽水)>의 지류 <호타하(浿水)>이다.

 

(사진) <회남자> 기록에 의한 고조선(환웅배달국+단군조선)의 강역.

 

(사진) 단군3조선의 강역 - 중원대륙 대부분을 찾지하고 있었다.

 

(첨부 글 )

유방(劉邦)이 한(漢) 나라를 세운 것은 북맥(北貊,고조선)의 힘이였다.

유방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항우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 했을까?
유방은 여러 방면에서 실질적으로 항우에게 밀리고 있었다.

지금의 하남성 낙양 근처의 영양(滎陽)을 중심으로 치열한 각축을 벌인 결과

항우에게 영양(滎陽)을 빼앗기게 된다.

영양(滎陽)은 장안(서안)으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요새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영양지역을 내어준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모든 힘의 균형이

이미 항우에게로 기울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상황의 유방은 어떻게 역전했을까?

당시 천자국(天子國) 단군3조선-번조선 진인(眞人副檀君)이

유방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후한의 반고(班固, BC 32~92)가 쓴 전한(前漢,BC 206~24)의 정사(正史) 중

<한서(漢書)> 권1, 고제기(高帝紀)제1, 상편에서

조선(朝鮮)에 관한 내용을 서술한 부분이 짤막하게 그 단서가 나온다.

북맥(北貉;고조선)의 날래고 용맹한 기병(騎兵)들이 제후국 연(燕) 사람을 대리고 와서 

한(漢)을 도왔다.(北貉燕人來致梟騎助漢).” 라고 기록하고 있다.

 

북맥(단군3조선)에 대해서는 당나라 초기 안사고(顔師古)가

<한서(漢書)>에 주석을 달아놓았다.

"동북방에 있는 삼한(단군3조선)에 속하는 족속들이 모두 맥()의 부류이다.

(貉在北方三韓之屬皆貉類也)"라고 하여 북맥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


BC 206년 경 한나라 유방을 선택한 북맥(北貉)은 누구일까?

<한서(漢書)>에는 단군조선, 해모수부여, 고구려를 모두 맥()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맥()은 바로 <단군3조선-번조선(弁韓)>이 존립하고 있을 시기였음으로

<단군3조선-번조선>를 가리키는 것이다.

 

당시의 동북아시아의 모든 것을 결정한 것은 <천자국 단군조선> 이었다.

천자 단군은 날래고 용맹한 기병(騎兵)과

중원가까이에 위치한 제후국 연 사람을 데리고,

유방을 돕게 함으로써 어지러운 싸움을 끝낸 것이다.

유방과 항우의 싸움은

유방의 장안(서안) 입성으로 한(漢) 왕조 성립을 선택한 것이다.

 

중원을 재 통일한 한(漢) 유방(劉邦)은

한 동안 자신들을 도와준 천자국 단군3조선-번조선의 속국으로

순종 조공을 바쳤다.

한(漢) 나러 유방은 장강 남쪽지방을 처 복속시켰으나,

동북방 고조선 제후국 연(燕)과는 다투지 않았고,

천자국 단군3조선-번조선에게는 계속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은인도 잊어버리는 것.

한 무제(漢武帝)가 단군3조선-번조선(弁韓) 제후국 연(燕)을 공격하여

복속시키니 허약해 진 천자국 단군3조선-번조선도

위만(衛滿)의 위장반란으로

연 사람 위만이 단군3조선-번조선 진인부단군으로 올라선다.

이를 후세가들은 <위만조선(衛滿朝鮮)>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한나라는 천자국 단군3조선-번조선을 뒤집은

<위만조선>에게 징벌의 싸움이 시작된다.

 

<위만조선>이 한 나라에게 망하고 호타하(패수), 조하(조선하)

단군3조선-번조선 지역에한 나라는 한사군을 설치하고 물러난다.

당시 수많은 단군3조선-번조선 유민들은 단군3조선-진조선,맑조선으로

대량 이주히게 된다.

 

이 무렵 단군조선-진조선(辰韓)도 지배세력이 흔들리고

걸출한 인물 해모수 장군이 <부여>를 다시 건국한다.

이 때 까지도 한 나라는 고조선 단군에게 조공을 받치고 있었다. 

 

그러나 신무기 강철검을 개발한 한 나라는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다.

 

천자국 해모수 부여의 후손 추모(주몽)왕이,

다물(옛 조선 복귀의 뜻)을 목적으로 일어나

북부여를 계승하고 한사군을 격파하고 고구려를 건국한다.

 

(사진) 단군3조선-진조선(辰韓)에서 일어난 걸출한 인물 해모수가

다물(多勿)의 <부여> 천자국을 다시 세운다.

 

지금도 국제관계에서 마찬가지이지만

천하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세력은 주변에 강대국들이다.

힘이 강한 항우의 세력보다는

다소 나약하고 천자국 단군에게 협조적인 유방을 도와줌으로써

그 나라에 대한 통제를 원활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고대 역사 사실이 이러 함에도 단군3조선, 해모수부여, 고구려가

저들의 지방정권이었다고 하는 지금의 지나(중국) 공산정부 작태는

역사 왜곡의 극치가 아닌가?

 

우리는 지금 지나(중국) 공산정부 주도의 왜곡 역사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아야 되며

천자국 단군3조선-번조선 단군이 한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외주었고 조공을 밭았던 것처럼

강한 국력과 일치된 국민들의 단결이 요구된다 할 것이다.

 

이런 <한민족문명>의 역사적 사실을 널리 알려

젊은이들의 자긍심을 높여 지금까지 잃어버리고 있는 고토

우리 조상의 땅을 회복해야 할 것이 아닌가?

 

 

<미안합니다><고맙습니다><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