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3. 23. 17:38ㆍ카테고리 없음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신채호는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연개소문'은
"조선역사 4천년 이래 최고의 영웅"이라고 극찬을 한 바 있다.
지나(China)대륙은 BC.10,000년 경부터 BC.300년 경까지 수천년 동안
환국-환웅배달-단군조선-해모수부여, 고구려,백제,신라,가라로서,
천자국(天子國) <고대조선(古朝鮮)>에 지배당한 역사적 경륜이 있다.
그래서 지나대륙 나라 이름이 "조선"의 제후국 명칭인
상, 주, 하, 진, 한 나라 등 일자국 이름(一字國名)을 벗어나 국호를 쓰지 못하는
스트레스와 트라호마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지나(China)는 고대 <산해경>부터 후한대 사마천의 <사기(史記)>등
거의 모든 역사기록을 자신들의 기준에서 부풀리거나 홀랑 뒤집어 기록하고
천자국 <조선>을 동쪽오랑케(東夷)라고 몰아붙이는 습관이 생겼었다.
지나(支那)는 이 관습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상,주,하 단대공정과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역사왜곡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천자국 고구려 역사 역시 ‘동북지방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왜곡해 지나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고구려와 수 및 당의 전쟁'을
'국내전'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지나(China)의 동북공정 및 상,주,하 단대공정도
주변 민족의 역사를 도적질 함에 이골이 난 20세기 중국공산당 정권은
결국 자신들의 뿌리까지 잡아먹는
환부역조(換父易祖)의 역사왜곡 대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것은 지나 한족(漢族) 화족(華族)의 원류 '황하문명'이 <조선>의 '요하고조선문명'에서
전래 파생된 <한민족문명>에서 부터 이루워진 것으로서
결국 자신들도 '조선의 환웅배달, 단군조선, 부여 민족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나(China)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산동, 강소성'까지 정복한,
고구려의 <연개소문(AD. 603~657)>에 대하여 알아보자.
(사진) 연개소문 초상화
<연개소문>은 과연 누구인가?
<연개소문>은 자신의 상무(尙武)정신을 크게 떨쳐
한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대영웅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병법가로서 지나(China;支那)에서도 널리 알려저 있었다.
당시 지나대륙에 발생한 수(隨) 나라의 위력은 대단해
지나대륙에 존재하던 '대륙백제(비류국)'와 '대륙신라(투후국)'를 밀어내고
지나대륙을 통일한다.
그 세력에 의해 '대륙백제'는 요서,진평,산동 지방을 잃고
한반도 서쪽 지방으로 움추리게 되는대 이시기가 '웅진백제'로 본다.
회하(淮河), 장강(長江) 유역에 있던 '대륙신라(투후국)' 역시 쫒겨
한반도 남쪽 가라국(金海)으로 동쪽 서라벌(金城)로 이주한다.
그 뒤 고구려를 침범한 수 나라는 청천강(?) 아니고 하북 浿水(호타하)에서
'을지문덕' 장군에게 수 나라의 100만 대군이 전멸을 당한다.
이 원인으로 수 나라는 멸망하고 당(唐) 나라가 새로 발생한다.
수 나라를 흡수해 뒤를 이은 당나라는 제국건설의 욕심에 휩싸여,
수 나라의 교훈을 잊고 당의 '이세민'은 동북아 천자국 고구려를 다시 침범한다.
이 때 <연개소문>은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패수(호타하)에서
당 나라 대군을 전멸시키고,
계속 진격하여 당의 수도 장안(서안)까지 진격해 고구려군이 주둔하니,
당 태종 이세민은 화살에 눈알까지 빠진 큰 부상으로
강소성의 한 우물 속(몽룡탑)에 숨어서 겨우 목숨만 살았지만
휘하 장군 대신들을 보내어 고구려에 항복하고
하북성과 하남성, 산서성, 산동성, 강소성을 고구려에 바치고
다시는 침략하지 않을 것을 다짐 밭고 일단락 철군한다.
당 태종 이세민은 눈빠진 부상으로 결국 죽게 되며
"고구려는 철전지 원수지만 절대 침범하지 말라"라고 유언까지 남긴다.
이처럼 신출귀몰 <연개소문>은
당이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고 명장이 명백함에도
역사속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전해지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연개소문>을
"조선역사 4천년 이래 최고의 영웅" 이라며 극찬한 바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역사 말살정책에 몰두한 친일사관 론자들과,
그에 부응하는 공자유교 사대론자들은 중화사상의 역사적관점에서
그를 바하시키고 오히려 역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사대주의 론자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도,
"임금을 시해하고 정권을 포탈한 잔악무도 포악한 역적"으로 악평한 것은,
당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평가로 보인다.
도대체 무엇이 그에 대한 평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르게 하였을까?
당시 동아시아 전쟁사 속으로 들어가 보면,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 있는 <연개소문>의 존재감을 느껴보기로 하자.
(사진) 광계토태왕 비문을 근거한 당시 동북아 당시 지도를 보자.
<연개소문>은 지나(China) 경극 독목관(獨木關) 등에도 등장할 정도로
지나(China)왕들과 귀족들이 두려워했던 인물 이었다.
그 줄거리는
"당 나라 '이세민'이 조양 봉황산(鳳凰山)에서
<연개소문>에게 쫓겨 죽을 위기에 처하자
'설인귀'가 나타나서 이세민을 구원해 준다"는 내용이다.
이 독목관(獨木關)은 <연개소문>과 '설인귀(거란 장수)'가 주인공이 되고
당 나라왕 이세민은 조연으로 전개되는 이 경극은
지나(支那;China)에서 가장 유명한 경극이다.
경극에 나온 <연개소문>은
용맹한 장군이지만 잔인하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된다.
얼굴은 푸른빛으로 화장하는데,
푸른빛 얼굴 화장은 동방 즉 '고구려 장군'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의 적국 당 나라가 변모시킨
<연개소문> 모습을 그대로 따라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쓴,
역사서로서 지나(China)를 사모한 사대주의 눈으로 썼음은
말 할 나위도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태백일사>에서는 <연개소문>을 이렇게 기술하였다.
"의표(儀表)가 웅위(雄偉)하고 의기가 호협하여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누워자고,
바가지로 손수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어 풀어냈다.
상을 줄 때는 반드시 고루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해 주었으며,
자기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심정을 들여다 보는 아량을 가졌다.
… 한번 기쁨을 나타내면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들도 가까이 할 수 있었고,
한번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들도 모두 두려워하였다.”라고 했다.
역사는 항상 소수의 영웅에 의해서 흘러온 것 처럼,
<연개소문>도 그러한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도,
“역사라는 수레바퀴를 진보와 발전의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은
창조적 소수인들 때문,” 이라고 하였다.
<한민족역사>에서도 항상 위기 때마다 나타나서
민족의 앞길을 연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1만년의 역사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진) 고구려 성곽의 특징 치(稚)구조 - 홍산문화 고구려 산성유적지.
(사진) 당 나라를 싸워 이긴 <안시성> 전투 - 역사 기록화.
- <안시성>은 청하(靑河)의 지류 호타하(浿水)와 수성진 근방에 있었다.
- 이 시기 고구려 평양성도 '대동강평양'이 아니고 '요동평양' 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천자국(天子國)이었다>
기원 후 581년, 수나라 멸망 이후,
369년간의 분열의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광활한 지나(China) 땅은 '이세민'이 통일한 당나라가 섰다.
그들은 당시의 대륙 패자,
천자국 고구려를 이기고 자신들이 천자국임을 천하에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천자국 고구려는 만만한 나라가 아니였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재위 391~413)'이 만주전역 옛 영토를 다시 회복하고
천자국으로서 안정과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고구려의 국시는 개국초기 부터 "다물(多勿)" 이었는데,
"다물"은 환웅배달-단군고조선-해모수부여의 영토와 문화를 다시 회복하는 것 이었다
'광개토태왕'는 이러한 고구려의 꿈을 실현한 위대한 동북아시아 천자국 황제였다.
천자국이 되고픈 지나(支那;China) 한족은
자신들을 기준하여 사방의 다른 민족들를 오랑캐(夷)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지나 한족이 부르듯이 동쪽 오랑캐(東夷)로 인식할 수가 없었다.
수 천년을 환웅배달-단군고조선-해모수부여의 <조선>을 천자국으로 모셔왔고
또 천하의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의 비문에도
“옛날 조상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더 굳건히 세우셨는데,
천왕은 북부여에서 오셨으며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인들은 나라의 정통성을 지키는 것을 하늘을 지키는 것
즉 "수천(守天)"이라고 하였다.
천지인(天地人) 삼신사상을 바탕으로
하늘(天)의 신과 땅(地)의 신과 조상(人)의 신과 한마음 되어
'신명(神明)나는 역사(歷史)'를 펼쳐가는 정신으로,
"하늘(天)"과 끊임없이 교감하여 별점(星佔)과 새의 날개짓으로 앞길을 일러받고,
"땅(地)"에서는 풍성한 곡물생산으로 배불리 먹고,
"조상(人)"을 공손히 섬기는 것이 삶의 행복한 목표였다.
그래서 고구려의 황제들은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로서
지나(중원)대륙에 군림하고 있었다.
역사의 운명은 두 패자를 동시에 인정하지 못했다.
고구려와 수 나라의 고수전쟁(高隋戰爭)이 발생한 그 당시
<연개소문>은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강화도의 전설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강화도 고려산 서남쪽 봉우리인 시루봉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단재 신체호 선생은 <갓쉰동전>, <규염객전> 같은 지나(China)소설이
<연개소문>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예기한다.
그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청소년기에
지나(China)의 상황을 자세히 살피고 귀국했다고 한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은 <김해병서(金海兵書)>를 지어 후세에 남겼다.
고려 때까지도 병마절도사가 지방에 부임할 때
이 책 한 벌씩 하사받았다고 한다.
오늘날은 유실되어 전해지지않고 있지만,
당 나라 태종 때의 명장이며 지나24장군 중 한 사람인 이정(李靖)도
<연개소문>의 제자로서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워 당나라의 제1명장이 되었다.
이정이 지은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지나(China)에 이름 높은 7종(種)의 병법서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해상잡록(海上雜錄)>을 인용하여 전하기를
“당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이정에게 <연개소문>에 대해 물었는데,
이정이 답하길 '<연개소문>의 병법은 수많은 장수 가운데서도 적수가 없고,
하늘의 위엄으로 임하더라도 이기기 어렵다.' 라고 아뢰었다” 라고 전한다.
<고구려 영류제의 대당 굴욕외교와 연개소문>
고구려 20대 장수제(재위413∼491)의 요동평양(대둉강 평양이 아님) 천도 이래로
안타깝게도 고구려의 국력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었다.
고구려 26대 고성제(영류왕;재위590~618)때는
지나대륙을 통일한 수 나라의 공격을 크게 물리처 수 나라를 멸망의 길로 가게 했다.
그러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고구려 27대 고성제(재위618~642, 영류왕)는
당에 대해 우호정책을 펴 나갔다.
그는 만여 명의 지나(China)군인 포로를 귀환시켜 주고
지나(China) 역서(曆書)를 반포했으며
지나(China)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천리장성을 축조하여 전쟁에 대비하고,
지나(China)의 도교(道敎)까지 수입했다.
고성제(영류왕)가 지나(China)의 요청이라면
모든 것을 들어줄 자세가 되어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지나(China)와 평화정책을 유지하는 한
적어도 강성해 가고 있는 지나(China)가
고구려를 침략하지는 않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급기야 고성제(영류왕)가 고구려의 일급비밀이라 할 수 있는
고구려 전 영토지도 "봉역도(封域圖)"를 당에 보내자,
고구려의 강성 군벌들은 모두 분개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고구려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지나(China)와 전투하였는데
고구려 전국의 지도를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에 침투할 수 있는 길은 알려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서기631년에는 당 사신의 요청에 따라
평양(요동 평양)의 경관(京觀)을 허물어 버렸다.
경관은 수나라와의 전쟁 때의 전몰장병의 유해를 묻은 기념묘지 탑과 같은 것으로
고구려인의 자부심이 담긴 성역이었다.
여기서 <연개소문>이 등장한다.
고성제(영류왕)에게 사사건건 반대의 의견을 내는
서부대인(西部大人) <연개소문>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고성제(영류왕)는 <연개소문>을 먼저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장성(長城) 축조 감독이라는 한직에 임하게 하고
임지로 출발하기 전 황제에게 하직인사를 하러 올 때 체포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를 미리 알게 된 <연개소문>은
평양성 남쪽에서 크게 열병식을 거행하면서
참석한 180여 명의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황궁에 있던 고성제(영류왕)도 찾아내어 죽이는 정변을 일으킨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야 당시의 영류왕 시해에 따른 이 사건을
재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이 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이덕일 교수는 이 사건이 단순한 쿠데타라기보다는
대당 굴욕외교로 일관한 고성제(영류왕)에 대해 고구려의 건국이념을 되살리자는
대당 강경파의 '반정 혁명'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풍전등화의 민족을 깨웠던 연개소문의 애국심>
민족사서인 <태백일사>는 <연개소문>의 면모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일러주고 있다.
고성제(영류왕)는 당에 사신을 보내 노자상(老子像)을 구해 오게 하여
백성들에게 노자 <도덕경>을 청강하게 하고
수십만의 백성을 동원하여 장성을 축조하게 했다.
이에 <연개소문>이 도교 강론으로 중화사상에 물드는 것을 파하도록 하고
수많은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장성축조 부역을 그만두도록 간언하자
황제는 그를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에는
“<연개소문>이 또 동북, 서남에 장성(長城) 쌓기를 주청하였다 하여
장성을 쌓는 것이 <연개소문>의 주청에 의한 것이라” 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신채호는
‘<연개소문>이 노자상과 도사(道士)를 청하여 왔다는 말과 함께 무설(誣說) 이니라’고
단호히 비판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철저한 반당(反唐)주의자 였다.
그러한 그가 명백히 적국인 당의 종교 "도교"를 받아들이자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연개소문>은 나라를 위해서는 홀로 허망하게 죽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문 앞에 맹수가 가까이 오는데 이를 막지 않으면서 도리어 나를 죽이려 하는가?”
<연개소문>의 이 말은 민족의 주체성을 스스로 내주고
바람 앞에 서있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고구려를 본 절규였다.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황제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하나, 자신을 죽이려는 황제를 시해한 정당방위적 행동이었다.
<태백일사>에서는 "황제가 몰래 송양(松壤)으로 피신하였으나
백성들이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붕어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연개소문>은 군사와 정치를 함께 통솔하는 대막리지(大莫離支)에 올라
당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는 백제 상좌평(上佐平) 성충과 양국이 병존할 수 있는 방안을 세웠으며,
또 신라 사신 김춘추에게 자신의 사저에 머무르게 하고 삼국연합을 권유했다.
그러나 김춘추는 끝내 듣지 않고 결국 당나라와 손을 잡았다.
보장제 3년(644년),
불과 3년 만에 당나라는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이유로 침략해 들어왔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실패를 거울삼아 오랜 기간 준비를 하고,
훈련된 정병(正兵)을 차출했으며,
수나라가 대군으로 바로 펑양(요동평양)으로 진격하다가
오도 가도 못하고 '을지문덕' 장군에게 패배한 것을 반성하여
요동성부터 잠식해 들어가는 것을 전략으로 삼고,
동시에 수군은 군사와 군량미를 실어 나르게 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전략을 눈치 채고 여러 성을 지는듯 내어 주었다.
그러나 당의 대군이 요서에 위치한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서는
3개월에 걸친 치열한 대접전 끝에도 성을 빼앗지 못했다.
당의 대군은 답보상태에 빠졌다.
이에 <연개소문>이 말갈병(고구려2중대)까지 동원하여 총공격을 단행하자
당나나 군은 안시성을 공략할 엄두를 못내고 퇴각하게 되었다.
퇴각하려는 그 와중에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쏜 화살이
당의 태종 왼쪽 눈에 꽃인것은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때 당의 대군이 얼마나 퇴각을 서둘렀는지 좋은 길을 두고
진흙수렁으로 변한 요수(蘭河) 하류 요택애서 갈대와 나무로 길을 만들며
죽을 힘을 다하여 겨우건너 도망쳐야 했다.
당시 당의 태종 이세민은 스스로 말채찍 끈으로 나뭇단 묶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이처럼 급하게 퇴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수 나라가 '을지문덕' 장군의 전략에 참패했던 것처럼
전쟁을 총 지휘하던 <연개소문>의 전략에 빠져
배후를 공격당하고 퇴로를 차단당한 큰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당의 태종은 <연개소문> 군대에 계속 쫒겨 죽을 위기를 맞았으나
거란족 출신인 '설인귀'가 나타나서 겨우 목숨을 구원받아
당의 수도 장안(서안)까지 도망가 우물속에 숨어 목숨을 건진 당의 이세민은
황하 북쪽(지금 화북지방) 땅은 고구려에 바치고
이후 고구려 침략을 금지 한다는 조건으로 철군을 결정하게 된다.
그 후 이세민은 원정실패에 깊이 탄식하여 이르되
'위징(魏徵)이 만일 있었으면 나로 하여금 이번 걸음을 하지 않도록 했을 것이다' 라고
후회하였다.
<태백일사>는 이후 상황까지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 군의 뒤를 계속 추격하여 황하를 건너
당나라 장안(지금의 서안) 용도성(桶道城)까지 추격하니,
당 태종은 우물속에 숨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었다.
이에 당 태종은 어찌할 방도가 없어
우물속에 숨어서 사람을 보내 “항복하겠다.”고 목숨을 애걸하였다.
결과 황하북쪽(하북성)을 고구려에 바치고
이 후 고구려 침략을 하지않을 것을 서약하니 <연개소문>은 물러 났다.
<연개소문>에게 혼비백산한 당태종은 화살 맞은 눈의 상처기 도져
서기649년 52세 나이로 숨을 거둘 때 유언을 남기기를,
‘파요동지역(罷遼東之役),
다시는 요동의 고구려를 치들어 가지 말라.
아비의 실패를 되풀이 하면 사직을 지키기 어렵다.’는 유언을 남겼다.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당시 고구려군의 장안(지금의 西安) 입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막리지는 '추정국', '양만춘', '고혜진'등
수만 기를 거느리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어
북치고 피리 부는 취악대를 앞세워 장안(서안)에 입성하여,
이세민과 더불어 약정(約定) 하기를,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江左;황하 좌측) 영토가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삼국사기>에도
“혜진이 마침내 장안(서안)에 이르렀다(惠眞竟至長安)”고 하여
고구려 장수 '고혜진'에 의한 당 본토공략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실은 ‘중국을 위하여 수치를 숨긴다’고 하는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의 역사기술에서 모두 숨겨 기록을 삭제하니,
후세인들이 이런 역사적 사실을 희미하게 잊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연개소문>이 서기 657년에 사망할 때까지
당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연개소문>의 큰아들 남생과 동생 남건, 남산 사이에 권력다툼이 시작되고,
고구려 귀족들의 내부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막리지를 이어받은 '남생'이 국경을 강화하기 위해 전국 순시를 나간사이
동생 '남건'이 일부귀족들의 꼬임에 빠저 도성을 지키고 있던 조카를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에 올라 '남생'을 죽이려는 추격대를 보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막리지 '남생'은 적국 당나라에 투항했다.
이 정변으로 고구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고,
신라는 당 나라와 연합하여 서기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태백일사>에는 <연개소문>의 묘소가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峯山)에 있다고 하였다.
신체호도 ‘연개소문이 혁명가의 기백과 재략은 갖췄으나,
조선 만대의 행복을 꾀할 수 있을 현재(賢才)에게 대권을 물려주지 않고
불초한 아들에게 넘긴 것을 보면
야심은 많으나 덕이 적은 인물이었던가 싶다’고 평하고 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고 하지만
<연개소문>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참고서적]
1) <한단고기(桓檀古記)> <태백일사(太白逸史)>
2) <삼국사기>
3) 신채호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4) 신채호 <독사신론(讀史新論)>
5)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