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6. 21:14ㆍ카테고리 없음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한민족의 최고 영웅을 <연개소문(淵蓋蘇文)>이라 했다.
<연개소문>은 초기에는 부하들을 아끼고 뛰어난 전술로 군통수와 전쟁에는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권력을 한손에 움켜쥐자 군벌독제로 탈변하여 귀족, 군벌, 백성들에게 인심을 잃었고
안시성과 마찰을 일으키니 고구려의 애국심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호시탐탐 놀이는 당나라를 앞에 둔 고구려가
국력과 애국심에 집중하지 못하고 흩어지고 내분이 생겨,
그가 죽은 뒤, 자식들 또한 서로 권력을 탐하다가
고구려를 멸망케 한 것이다.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에서
고구려는 결국 연개소문의 독제권력 때문에 멸망한 것으로 판단하고
한민족의 최고 영웅으로 삼국통일을 한 <김유신(金庾信)>으로 꼽은 것이다.
당시 지나(China)의 당나라와
한반도 고구려, 백제, 신라와 똑같은 <정치적 야망> 지도가 현재도 보인다.
이들의 <정치적 야망>은 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앙숙으로 다투고 있다.
동북공정으로 한반도를 옛 당나라 처럼 삼키려는 지금의 중국공산당 정부와
한반도 북한공산당과 남한자유민주의 동(신라)집단세력과
서(백제)집단세력으로 갈라진 삼분열(삼국),
정치적 앙숙으로 서로 더러운 묘책을 쓰며
한 민족이 아닌 것 처럼 서로 질시하고 이간질하는 형태로
서로 집어 삼키려 하고 있다.
백제는 당나라의 침범을 앞에 두고 내란 진압에 정신이 없었고,
당나라 소정방 군대가 상륙하자 크게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니,
의자왕과 귀족들과 군벌 흑치상지는 백성들은 팽개치고
자신들만 살려고 당나라에 투항하고 영화를 누리다 말 없이 죽었다.
고구려 또한 연개소문이 죽자 장남 연남생(淵男生)이 대막리지에 올라
전국을 순시하러 떠난 사이 차남 연남건(延南建)이 스스로 막리지에 올라
남생의 아들 남건 자신의 조카를 죽이고 남생에게 토벌군까지 보내자,
남생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고 결국 당나라에 항복하고 만다.
또한 연개소문 동생 연정토는 신라로 도망가서
신라를 끌여들여 '나당연합군'을 만들고
고구려를 공격해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 시기 신라 김춘추(金春秋; 604~661)와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한반도에서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당나라 기마군단을 보고,
당나라의 속샘이 신라까지 멸망시키려는 것을 갈파한다.
김유신은 화랑을 중심으로 일체단결하여
당나라와 "나당전쟁"으로 7년 동안 피터지게 싸운다.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을 상주(尙州)경계 당교(唐橋)에서 암살하고,
'소정방'의 기마군단을 임진강에서 몰살시켜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힘겹게 삼국을 통일한다.
그러나 신라 김유신은 백제, 고구려 옛 땅 요서지방을
모두 회복하지는 못했으나,
힘겹게 서압록(지금의 요하)에서 철령위 및 아무르까지 회복한다.
당시 신라에 김유신 같은 명장이 없었다면
한반도는 그 때 이미 당나라 땅으로 변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 한반도에서 <남,북과 동,서>로 싸우는 <정치적 삼국> 현실에서
한반도 통일을 원한다면,
외세(미국 또는 중국)를 이용해서라도
통일할 수 있는 <김유신>의 지략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깁부식도 <삼국사기>에서
강했지만 내분으로 고구려를 망하게 만든 <연개소문>보다,
약했지만 지략과 화랑의 뭉침으로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을
'한민족 최고의 영웅'으로 뽑은 것으로 보인다.
<김유신>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그 노래 삼국을 통일한 위대한 지략과 덕행의 장군이었던 것이다.
그가 죽은 뒤,
그의 한민족 통일이 얼마나 위대 했는가를 느낀 통일신라인들이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함으로 '죽어서 태왕(太王)이 된' 것이다.
김유신은 금관가야 마지막왕 구형왕(仇衡王; 제위521∼532)이 증조부이고,
왕세자 김무력(武力;518∼579) 장군이 조부이며,
김무력의 아들 김서현(舒玄) 장군이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는 신라 지증마립간의 증손녀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김서현 장군이 충북 진천 현감으로 있을 때
충북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에서 김유신이 출생했다.
그래서 김유신의 태실이 충북 진천 태령산 정상에 있는 것이다.
(사진) 삼국을 통일한 <흥무태왕 김유신> 영정.
(사진) 흥무태왕 김유신 장군의 태실- 충북 진천군 태령산 정상.
금관가야 구형왕은 신라 진흥왕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알고
백성들을 살리고 고통 받을 것을 피하기 위해 진흥왕에게 금관가야를 바치고
경남 산청으로 들어가 몇 년 후 죽었다.
그래서 산청에 구형왕릉이 있는 것이다.
당시 가야의 왕자 왕손들은 신라 골품제에서 진골신분을 받기는 했지만
이방 진골 귀족의 약화를 목적으로 가야의 왕자 왕손들을
변방으로 한직으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왕세자 김무력 장군도
백제, 고구려 접경지역 한강주변에서 근무하게 했으나,
<삼국사기>에도 김무력 장군의 전공이 자주 등장한다.
신라가 한강 하류, 즉 오늘날 서울과 수도권 일대에서
새로운 영토(新州)를 확보하고 초대 군주(郡主)로,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과 4명의 좌평을 참살하고
병사 2만9000여 명의 수급을 베는 대승을 거두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지는 계기를 만들기도 헸다.
이 전투로 김무력 가문은 신라의 신흥귀족으로 등장하였는데,
창녕의 <진흥왕척경비>, 단양의 <신라적성비>,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에도
김무력 장군의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신라영토를 넓히는데 많은 활약을 하였다.
그는 신라 조정의 각간(角干)벼슬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 김서현(舒玄) 장군도 진평왕 때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지금의 양산,울산)을 역임하였고,
딸 문희(文姬)는 태종무열왕(김춘추)의 왕비가 되었고,
아들 김유신은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보필해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하여
신라 역사상 최고로 숭앙(崇仰)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신라 조정에서 김무력과 김서현의 공훈을 천양(闡揚)하여
경상남도 양산 영축산(靈鷲山)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하고
묘지와 제실 및 선도비를 건립하였다.
(사진) 금관가야 마지막왕 구형왕(仇衡王) 릉 - 경남 산청.
(사진) 4국을 통일한 흥무태왕 김유신 릉 - 경주.
(사진) 김유신 장군의 祖父 김무력 장군, 父 김서현 장군의 묘와 제실 및 선도비
- 경남 양산 축서산 통도사 인근.
(사진) 사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 무술연습 장소, 칼로 자른 바위로 알려진
- 경북 건천 단석산.
(사진) 사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 동상 - 경북 경주시 황성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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