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문명>의 <약밥과 떡>

2022. 8. 22. 19:21카테고리 없음

<떡>과 <약밥>은,

기원전 10,550년 신석기 초기에 <단립쌀> 재배에 성공한 <한민족> 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였다.

<밀>로 만든 '빵'과 비교하면 고급영양 성분을 함유된 <쌀>의 축복인 셈이다.

 

<떡>과 <약밥>은 '찹쌀'을 주 제료로 만들어 지고, 

그 위에 기피(녹두)고물, 팥고물, 콩고물, 또는 께를 추가해서

'찹쌀'의 함유성분 위장의 점막보호, 소화촉진 기능과

고물의 식물성 단백질과 지방질 등 조화로운 섭취로 인해,

해독작용, 약용작용이 더한 최상의 약성음식 식의(食醫)였던 것이다.

이는 인류 최초로 <단립쌀>을 재배생산한 <한겨레문명>만 누리는 특권이다.

 

<한민족 한겨레>가 보유하고 있는 <떡>이나 <약밥>의 종류는 아주 많아

여기서는 다 설명하지 못하지만,

지역마다 마을마다 가문마다 집집마다 특이하고 화려한 <떡>과 <약밥>을

지금도 만들어 먹고있다.

 

<밀>을 주식으로 하는 민족보다  <쌀> 주식으로 하는 민족이 두뇌가 더욱 좋아지고,

여기에 '놋젓가락'으로 어릴적 부터 섬세한 손가락 놀림기능 때문에 두뇌가 더욱 발달한,

범상한 <한민족 한겨레>은 그 우수한 두뇌로

세계의 과학을 석권하고

세계의 예술문화를 선도하고,

세계 우주기술, 군사력을 첨단에서 이끌어 가게 될 것이다.

 

(사진) <한겨레문명>의 청동기시대 풍년을 하늘에 제사지냈던 청동기'

 

(사진) 그 청동기 속에 그려진 '따비'로 밭울 가는 농민 남자.

 

<떡()>

<한민족>이 <떡>을 만들어 먹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단립쌀>을 재배하기 시작할 시기로 추정된다.

<한민족 한겨레> 최초의 단립쌀 재배법을 확보한 그들이 쌀 요리법도

서서히 개량되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쌀을 반반한 바닥돌에 풋돌(손에 든 갈돌)로 갈아서

'옹배기'에 물과 함께 넣고 '죽(粥)'을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때 '옹배기'는 <한반도>에서 처음 발생된 <뽀쪽밑빗살무늬토기>였을 것이다.

그 뒤 곧 시루를 고안해 냄에 따라 쌀가루를 쪄서 덕는 <떡>을 발명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진) 청동기시대 토기 한겨레의 <시루>와 <바가지>

- 함경북도 나진 초도에서 출토(최고 오래된 시루와 바가지).

 

(사진) 청동기 시대 토기 시루

- 함경북도 나진 초도 출토.

 

한반도는 신석기시대부터 '시루'를 사용한 것으로 생각되나 

김해 응천 조개무덤에서 출토된 '놋시루',

기원전 4,300~2,200년 경 산동반도 동이족의 용산유적과 요동유적에서

‘언(甗)’이란 토기찜기의 출토,
고구려 안악고분벽화, 약수리고분벽화에 '시루'로 음식을 다루는 그림 등,

청동기 '시루'가 부엌용기로 보존되고 있다.

 

(사진) BC. 4,300~2,200년 경 산동반도 동이족 한겨레 용산유적 ‘언(甗) 찜기(솥)토기'.

 

당시의 대표적 곡물인 단립쌀. 피, 기장, 조, 보리, 밀과 같은 곡식을 가루로 만들어

시루에 찐 지금의 시루떡과 똑 같은 <떡>을 만들어 먹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콩, 팥, 녹두, 들께 등을 고물로 만들어 먹은 것으로 보인다.

 

지나(China)의 자료를 보면,

한(漢) 나라 이전과 이후에 <떡>을 가리키는 글자가 달라진다.

그 이유는 당시 지나(China)를 지배하고 있던 민족(사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쌀>주식 민족과 <밀>주식 민족의 교채기의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밀가루가 보급되기 이전에 한겨레는 <떡>을 <이(餌)>라 표기하고,

쌀, 기장, 조, 콩, 팥 등으로 만들었지만,

밀가루가 보급된 이후에는 밀가루를 <떡>처럼 기름에 지진 것을 <병(餠)>이라 표기하게 된 것이다.

 

기원전 300년 이전에는 한반도와 청구지방(황하 북쪽과 만주), 몽골, 시배리아 전 지역은 

<쌀>을 주식하는 <동방족(倍達族) 한겨레> 고대조선(칸국+배달국+조선국) 천자국이 존립했고,

<밀>을 주식하던 <서장족(西藏族)>은 황하 상류 서장(西藏) 모퉁이에 기거하였다.

 

당시 군웅활거 전국시대를 맞은 지나배륙에서

서장(西藏) 하화족(夏華族) 진 시왕이 황하남쪽 일부를 통일했고,

연이어 BC.206년 유방(劉邦)이 한(漢) 나라를 성립시켜

주식을 <밀>에서 <쌀>로 어느정도 바뀌어 갔기 때문이다.

 

<한민족 한겨레>는 <쌀>로 만든 <떡>은 이(餌)라 표기하였지만,

'한족'은 <밀>로 만든 떡을 <병(餠)>이라 표현한 것이 옳바른 설명이다.

 

사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시루에 <떡>을 찌고 있는 주방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에도 시루는 주방용기로서 <떡>이나 찐밥 <약밥>을 만들어 먹던 용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찐 찹쌀 밥을 절구에 쳐서 납작하게 만든 '인절미'나 '절편'은,

밀가루를 기름에 지진 '유전병'과는 상당히 다른모양 다른맛 이였다.

 

(사진) 고구려 고분벽화 <떡>을 찌고 있는 정지(淨地).

- 안악3호 고분.

 

삼국사기에서 신라3대 유리왕자와 석탈해가

“떡(餠)을 물어 잇자국을 시험한 즉,

유리왕자 잇자국 금이 많은 지라 군신들이 유리왕자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다.”는

고사 내용은 잇자국 금(이사금)이 선명하게 잘 남을 수 있는 '인절미'나 '절편'이

그 당시에는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양곡증산을 독려해 쌀밥 보급율이 높아지니,

<떡>, <약밥>을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고려 후기 몽고족이 세운 '원' 나라에 영향하에 있을 때

고려는 원 나라 <밀떡> '상화병(霜花餠)'이 수입되었고

아울러 <쌀떡> '고려병'도 원 나라에 수출되기도 하였다.

'상화병'은 밀가루/기주(생막걸리)/돼지고기/순무/마늘/후추/식초로 만든

지금의 "찐빵"돠 같은 것이었다.

 

(사진) 원 나라 <밀떡> '상화병'

- 지금 우리나라 고기속의 찐빵과 같다.

 

원 나라 고서 거가필용(居家必用)에는

"밤을 그늘에 말려 속껍질까지 벗기고 성글게 찧어,

찹쌀 3분과 밤가루 2분을 섞어 꿀물에 적신다음

시루에 찐 <떡>을 <고려율고(高麗栗餻)》로 소개하고 있다.

 

(사진)  한국의 <쌀밤떡> <고려율고> 재현.

 

지봉유설 芝峯類說에서

고려 사람들은 상스러운 날에 먹는 <떡>으로는 <쑥떡>을 으뜸으로 쳤다고 한디.

 고려사의 최승로조(崔承老條)에는

"광종이 <떡>으로 걸인에게 시주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신돈조(辛旽條)에서는

"신돈이 <떡>을 부녀자에게 던져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고려시대에는 <떡>이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한국의 <쌀떡> '시루떡'

- 쌀가루와 고물을 층층이 깔아 시루에 쪄 잘라먹는 떡이다.

 

(사진)  한국의 <쌀떡> '절편'

- 찰밥을 떡매로 처서 납짝 반반하게 만든 떡이다 .

 

(사진)  한국의 <쌀떡> '인절이'

- 찰떡에 콩 고물, 기피 고물을 뭍인다.

 

(사진) 한국의 <쌀떡> '쑥버무리'

- 한국인은 '쑥'을 특히 좋아하여 초봄 어린쑥과 쌀가루로 만든다.

 

 

<약밥>

<약밥>은 약이 되는 밥이다.

'꿀'을 약(藥)으로 쓴 <한민족>은 '꿀밥'을 <약밥(藥飯)>이라 하게 되었다.

 

음식 잘 먹는 것이 약이라고 생각하는 "약식동원(藥食同源)"사상에서 그 유래가 비롯되어

<약밥>이 '밥' 중에서 가장 약(藥)이 되고 보신(補)이 된다하여 <약밥>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약밥>에는 찹쌀/벌꿀/대추고/께기름/계피/밤/대추/잣/추자가 들어간다.

 

(사진)  한국인의 현대 <약밥>.

고대 <약밥>은 찹쌀/벌꿀/대추고/밤가루/께기름/계피/대추/잣/추자로 만들었다.

 

(사진)  한국의 <고려약밥>

- 대추고(대추쨈)와 꿀(엿)로 색과 맛을 잡고, 밤가루/대추/추자/잣을 첨가한 약밥이다.

 

《삼국유사》에서, 신라 21대 소지왕(炤知王) 10년 정월 보름날,

왕이 경주 남산의 천천정(天泉亭)에 친히 거동했을 때

갑자기 까마귀 떼가 날아들고 그 중 한 마리가 봉투 한 장을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신하들이 주워서 봤더니

“이걸 뜯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뜯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적혀 있었다.

한 사람은 왕이라 생각하고 서찰을 열어보니

“당장 환궁하여 내전 별실에 있는 금갑을 쏘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왕과 신하들은 급히 환궁하여 금갑에 활을 쏘았는데,

그 안에서 왕비와 내원(內院)의 분수 승(僧)이 왕을 죽일 모략을 하고 있었다.

왕은 두 사람을 주살하고 역모를 평정하게 되었다.

 

이후 왕은 까마귀 덕에 화를 면했다고 하여,

정월 대보름을 ‘오기일(烏忌日)’로 정하고,

까마귀 처름 검은색의 <약밥>을 지어 하늘에 제사(祭)를 올리고 

까마귀에게 먹이로 뿌려 보은을 올렸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미안합니다><고맙습니다><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