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나라 시조 '주원장' <고려출신>.

2014. 10. 30. 08:01역사(한단고기)

경상도 금오산 숭산(崇山)마을에 옛부터 전해 내려 온

전설적인 설화(說話)가 있다.

"금오산(金烏山)은 금가마귀 삼족오(參足烏)가 살고 있는 태양산으로서,
이 산의 남쪽에서 앞으로 3명의 의인(義人)이 태어나는

동방의 길지(東邦吉地)" 라고 했다.

 

경상도 금오산 남쪽 골짜기 숭산(崇山) 마을의

<주원장> 설화(說話)는 이러하다. 

 

"숭산 마을의 가난한 주씨(朱氏) 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주원장>은,

5살에 스님을 따라 청송 '주왕산' 어느 절로 가서 동자승로 자랐다.
어려서 부터 민첩하고 영특한 <주원장>

15살에 속세 나와 전국을 탁발승으로 떠돌아 다녔다.
17세에 산적에게 잡혀 노예 상인에게 끌려 원 나라 노예로 팔려갔다.

원 나라에 팔려간 <주원장> 홍건적의 졸개가 되었다.

함께 노예로 끌려간 고려사람들과 목숨을 걸고 용맹하게 싸웠고,

큰 공을 세운 <주원장> 홍건적 강회(江淮)지역 두목의 사위가 되었다.

그 후 세력이 크진 <주원장>은 반란군의 제2인자가 되었고,

드디어 원 나라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명 나라를 세워 명 나라 태조가 되었다."

이상은

경상도 금오산 숭산(崇山)마을 노인들이 전해오는 구전설화이다.

 

지금도 이곳 촌노(村老)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곳 숭산 금오산 남쪽자락은

고려왕자 '대각국사 의천'이 기거하던 '선봉사(僊鳳寺)'와

'고려귀족마을'이 있었던 곳이었지만,

몽고병란과 임진왜란으로 하여 '금오산성'이 전장터로 변하여

산 아래 사찰과 민가마을이 모두 초토화 되었다.

금오산 남쪽자락에서 출생 할 3명의 의인(宜人)은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 <주원장>을 첫번쩨 의인으로 알고,

한국의 5,000년 가난을 물리쳐 부국으로 만든 <박정희> 대통령

두번쩨 의인으로 알며,

3번쩨 의인은 앞으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라는 이야기다.

 

말하기를 3번째 의인은 남북통일을 시키고

고대조선(환인칸국+환웅배달국+단군조선), 부여, 고구려의 

방대한 영토를 되찾아 세계 최대 강국을 이루는 지도자가 될 것이란다. 

 

그 3번째 의인이 언제 나타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속히 나타나기를 바라고 기다리고 있다.

 

(사진) 금오산 효자봉 줄기

아래 숭산,강진 마을. 

왼쪽은 구미 상모 마을,

오른쪽은 약목.멀리 낙동강이 보이고,

경부고속도로 낙동대교, 경부고속철도가 보인다.

 

 

(사진) '금오산' 첫째 의인 명나라 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명(明) 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1368년~1398년 제위)은

그의 황후(皇后)도 역시 고려인 '한영정(韓永정)'의 딸로서,

세조때 명신 '한확(韓確)'의 누이 '한(韓) 여비(麗妃)'였다.

 

한 황후는 명 제3대 영락제(永樂帝)의 친 어머니 이시다.

 

또한 한 황후의 동생 한계란(韓桂蘭)은

제5대 선덕제의 황후가 되었으니

'한확'은 두명의 누이동생이 명나라 황후가 된 샘이다.

 

<주원장>은 명 나라 태조로 즉위하기 전에 이미 고려여인 석비(碩妃)가 있었는데

석비는 명나라 함산공주(含山公主)의 친 어머니가 된다.

 

얼마 전, 한-중 사학자들 사이에 '주원장의 출생'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상당수의 한-중 학자들이 "주원장이 고려인 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한국의 <조선기문>에 기록된 설화를 근거로 한다.

<조선기문>에는 명태조 <주원장>이 등장한다.

"<주원장>은 경상도 웅천의 주씨 노부부의 아들로 5살이 되던 해,

고승을 따라 절에 들어갔다가

15세에 하산했으며

총명하고 민첩했다고 적혀있다."

또 한국 민간전설집에는

"주원장이 원 나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 라는 이야기가 적혀있어

더욱 신빙성을 더했다.

반면 지나(China)학자들은 '오함'의
<주원장전>을 들어

"주원장"의 고려인설은 터무니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오함'의<주원장전>에서 주원장은,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縣)출신으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16세에 고아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기근을 피하기 위해 봉양현에 있는 황각사(皇覺寺)에 입문하여 승려가 되어

하북지방 일대에서 탁발하였다." 라고 되어있다. 

이를 반박하는 학자들은 오함의 <주원장전>은

<조선기문>에 실린 탄생설화를 보고 지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오함의 <주원장전>은 <조선기문>이 발행된 뒤에

만들어 젔기 때문이다.

 

지나(China)인들은 예부터 동이족의 걸출한 역사는 홀랑 뒤집어

자신들의 역사로 왜곡하는데 명수였다.

이 <주원장전>도 <조선기문>을 홀랑 뒤집어 배낀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책이 일치하는 점은,

주원장의 출생과 매우 가난한 어린시절,

주원장이 5살에 절에 들어갔다는 점,

그리고 주원장이 걸식하며 떠돌아다닌 시기가 15세~17세가 거이 일치한다. 

또 하나, 주원장이 명태조가 된

전,후에도 주변에는 유독 고려인이 많았다.

주원장의 여인들은 물론 황궁의 환관들과 궁녀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고려인으로 체워졌다.

그의 심복인 '추유'까지도 고려인으로서 각별히 신임했다.

 

또한 명나라 시조 홍무제 주원장은 자신도 <한복(韓服)>을 입었지만,

명나라 황실과 궁녀 대신들에게도 모두 <한복(韓服)>을 입도록 했다.

황후는 물론 궁여들도 모두 편리하고 화려한 한복(韓服)을 좋아했다.

그에 따라 나라의 공식 복식은 조선한복(朝鮮韓服) 이었던 것이다. 

 

(사진) 명나라 복식은 고대조선한복(朝鮮韓服) 이었다.

-고대조선한복, 깃(고대;동전)이 왼쪽방향으로  여미여 저 있다(고구려 벽화 속 인물)

 

그 때문에 주원장은 한족(漢族;華夏族)들에게 미움을 삿고

주원장은 한인(漢人) 대신들을 거의 다 죽이고

정치, 군사, 경제를 고려인들과 친정하기도 했다.

또한 주원장의 아들 제3대 황제 '영락제'의 친모가 고려인 한여비(韓麗妃)로서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이러한 주원장의 부인들에 대해서 지나의 사학자들은

고려의 공녀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아직까지 한국과 지나의 학자들이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고려 공여설'은 어처구니없는 모순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명나라 건국이 1,368년이다.

3대 명황제 '영락제(永樂帝)'는 1,360년 출생이니,

명나라가 개국하기 8년 전에 이미 태어났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반란군 홍건적 토벌을 위해 

이성계 장군과 2천여 고려군(려,원 연합군)을 원나라 지원에 참여한 상황인데,

어떻게 반란 홍건적 소 두목인 주원장에게 고려여인을 공녀를 보냈겠는가?

더구나 영락제가 출생한 서기 1,360년은

장사성(張士誠), 진우양(陳友諒)의 홍건적 거대세력이 있었던 때다.

당시 주원장은 별로 두각을 나타나지도 않던 작은 무리였을 뿐인데,

고려조정에서 조공 공녀를 보냇겠는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론이다.
 
제3대 명황제 영락제는 후에
티벳, 베트남, 남만주 등을 평정하여

명나라 최대의 영토를 넓혔으나

조선과는 한 차례도 전쟁을 하지않고 오히려 조선을 우대하였던 것이다.

또한 '영락제'는 거대한 선단(船團)을 만들어 환관 '정화'를 시켜

6회에 걸쳐 멀리 '아프리카'까지 정복하였으니,

지금까지 지나인들에게 가장 높은 자긍심을 심어준 황제로 남아있다. 

 

또한 주원장은 명나라 개국시기부터

한(漢)인 대신들과 한인 환관들의 말을 믿지 않았고,

주변에 많은 고려인들을 측근으로 두고 그들과 국사를 논하였다.

그 이유로 한인들의 조롱과 비웃음이 심해지자,

주원장은 한인 대신들과 수많은 한인들을 잡아죽였다.

그래서 지나 역대 황제들 중에 가장 포악한 황제로 주원장을 꼽고있다.

 

그러나 고려와는 우호와 존중을 지켰던 주원장은

고려를 뒤집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를 신임했고,

조선에서 더 많은 환관과 궁여들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해

명나라 궁궐을 조선인들로 채웠다.

 

명 나라는 서기 1,368년에 건국하고,

서기 1,644년에 멸망해 276년 동안

고대조선 건주여진족(建州女眞族)의 

"누르하치(Nurhachi;奴爾哈齊)"에 의해 패망한다.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後金; 청)

금(金) 나라 처럼 조선과 같은 핏줄의 족속들이 건국한 나라들 이었다.

조선(朝鮮)은 후금(後金)=청(淸)나라와 형제로 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권력은 변하고 서로 마찰이 생기니

동생이 형님에게 조공을 바치고 다투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금(金)나라, 청(淸)나라는

고려(高麗) 및 조선(朝鮮)과 나란히 지나대륙을 다시 회복한,

동이한겨례가 세운 나라로서

조선 <한민족>의 역사다.

 

(사진) 주원장이 태어났다는 설화가 있는 숭산(崇山)마을이 있는 금오산.

  

 

[참고] 명(276년) 나라 건국 및 멸망 년도(1368-1644).

제1대 태조 홍무제 주원장 (1368-1398), 30년 제위.
제2대 건문제 주윤문 (1398-1402), 4년제위.
제3대 성조 영락제 주체 (1402-1424), 22년제위.
제4대 인종 홍희제 주고치 (1424-1425), 1년 제위.
제5대 선종 선덕제 주첨기 (1425-1435), 10년 제위.
제6대 영종 정통제 주기진 (1435-1449),14년 제위.
제7대 경태제 주기옥 (1449-1456), 7년 제위.
제8대 영종 천순제 주기진 (1457-1464), 7년 제위.
제9대 헌종 성화제 주견심 (1464-1487), 23년 제위.
제10대 효종 홍치제 주우당 (1487-1505), 18년 제위.
제11대 무종 정덕제 주후조 (1505-1521), 16년 제위.
제12대 세종 가정제 주후총 (1521-1566), 45년 제위.
제13대 목종 융경제 주재후 (1566-1572), 6년 제위.
제14대 신종 만력제 주익균 (1572-1620), 48년 제위.
제15대 광종 태창제 주상락 (1620), 원년 제위.
제16대 희종 천계제 주유교 (1620-1627), 7년 제위.
제17대 의종 숭정제 주유검 (1627-1644), 17년 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