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18. 09:33ㆍ골프(지구를 친다)
"탕~탕~탕"
1917년 11월 9일 저녁 6시,
경북 칠곡군 북삼면 오태1동(현 구미시)의 고대광실에서 총성이 울렸다.
대한광복회 회원 3명이 이 집의 주인 장승원에게 권총을 발사하는 소리다.
이들은 총을 발사한 후 집 담장에다 포고문을 붙였다.
"조국 광복에 협조하지 않는 大罪人을 처단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진)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
울산출신 박상진 의사는 1910년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가,
나라가 망하자,
<대한광복회>를 조직해 '총사령'으로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만주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도 <대한광복회> 만주지역 사령이었다.
박상진 총사령은 중국에 가서 권총을 10여정 갖고와 부하들에게 나눠준 뒤
먼저 광복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 작전을 벌였다.
장승원은 한말 경상도관찰사(지금의 도지사)로 지내며
고리 장려빗을 주고 곡식이나 돈을 못 갚는 소농들을
무작정 잡아와 "내죄를 알렷따"며 두들겨 패어 땅 문서를 빼앗아
경상도 최고 대부자가 되었지......
그 대부자 장승원에게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자,
단호히 거절하고
오히려 일본 경찰에게 밀고하려 하자 처단한 것이다.
이렇게 죽은 장승원에게는 아들이 3명 있었다.
큰 아들 길상, 둘째 직상, 셋쩨 택상이다.
아버지가 피살되자.
장길상은 소작인들에게 가혹한 소작료를 물리고 친일활동을 벌이다
인심을 잃고 근거지를 대구로 옮겨 땅을 판 돈으로 은행을 세웠고,
그 후 경성으로 올라가 더 밀착한 친일행각을 했지.
장직상은 대구상공회의소 회장에 이어
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오르는 등.
친일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온 정성을 다해 '반민족행각'을 벌였다.
그리고 그 유명한 장택상이 바로 장승원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에서 성장해
모든 사고방식이 일본인과 똑 같았다.
장택상은 어릴적 부터 일본에 완전 동화된 일본인으로서
영국귀족학교로 유학해 대학을 마쳤는데?
한국의 정서와 인문(人文)을 모르는 반 한국적 인격체였다.
◈ 남한을 접수한 미군정은 '장택상'을
수도경찰청장으로 임명한다.
일본경찰은 물러 갔지만 일본인이나 다름없는 장택상 같은
한국의 정서를 전연모르고 일본인으로 성장한 인격체가
영어를 잘 한다는 이유로 '조병옥' 과 함께,
미군정의 한국경찰 최 고위직 '수도경찰정장'에 오른 것이다.
여기서 부터 한국의 친일청산 문제가 꼬이기 시작하게 되었다.
(사진) 미 군정시절 수도경찰청장의 막강한 권력을 쥔 친일파 '장택상'.
해방 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의 첫 작업은 남한의 치안경찰이었다.
경찰의 최고 우두머리 경무부장에 '조병옥'을,
수도경찰청장에 '장택상'을 임명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을 탄압한 자들의
우두머리였다.
이 두 사람은 영어를 잘 구사하는 친미파이고.
반공사상이 투철하고
이승만을 옹립하려는 한민당원이었다
이들과 미군정은 치안을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일제 앞잡이 조선인 친일경찰관을 대거 채용했었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가 무서워
도망쳐 숨었던 친일경찰들 까지도
다시 찾아내어 치안의 공백을 메꾼다는 이유로
독립 한국경찰로 복직시켰으니 말이다.
일제 말기에 조선인 친일경찰관은 무려 2만명이 넘었는데
1946년 10월에 남한경찰관들이 2만5천명을 확보했으니,
일제 친일경찰관 거의 모두가 남한경찰관으로 복귀된 샘 이었다.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3년 가까이 경찰을 지휘하면서
심혈을 기울인 사업은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경찰의 물리력을 이용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
2. 좌익 공산당을 잡아내고 치안을 확보한다.
3. 친일경찰관을 중용해 수족처럼 부려 독립투사 집안을 말살시킨다.
4. 내 아버지를 죽인 독립투사들을 탄압해 가슴에 맺힌 울분을 푼다.
장택상은 이 4가지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아니, 너무 철저하게 수행하느라 남북합작의 대립을 심화시켜 통일을 방해했고,
순국선열, 애국지사를 극도로 탄압하여 민족정기를 훼손시키고,
수많은 민족애국자들과 그 후손들 가슴에
씻을 수 없는 깊은 한(恨)을 심어 놓았다.
1946년 10월에 발생한 대구 폭동사건도
독립투사 애국지사들의 원한이 친일경칠들에게 폭발한 사건이었다.
이 폭동을 겪은 어느 공무원의 회고를 들어보자.
"사람들이 모두 대구경찰서 앞에 집결했다.
나도 경찰서로 가는데
한 사람이 심하게 두들겨 맞아 길가에 정신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유혈이 낭자하게 부상을 입고 넋이 빠진 채 말도 못하고 있는 사람을
몇 사람이 둘러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왜 저리 됐는지 이유를 물었더니
'뭐~ 왜놈에게 붙어 못되게 굴다가 저리 됐지" 라고 하더군요.
그날 대구시내 분위기는 친일하던 경찰이나
왜놈 앞잡이를 하면서 시민들을 괴롭혔던
사람들이 모두 끌려나와 두들겨 맞았던 것이다.
이것이 대구폭동 사건의 전말이다.
대구폭동 사건이 안정된 후,
대구에 도착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과 경찰간부들은
"폭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모조리 체포, 구속하고
주모자는 즉결 처분해 버려라," 라고,
장택상이 지시했다.
이 후 부터 친일파를 손가락질 하던 일반시민들도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었다.
당시 미군정 경무부 고문 '매글린' 대령까지도,
"민주경찰이 국민의 생명을 파리 목숨만큼도 여기지 않으니
이럴 수가 있느냐?"고
오히려 조병옥과 장택상에게 항의 할 정도였다.
일본경찰보다 더 악질 조병옥 휘하 장택상과 친일경찰은
일본놈들이 물러간 뒤에도 활개치면서 권력을 더 휘두르니
전국 곳곳에서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애국애족 독립운동을 했던 시민들이
악질 친일경찰을 두덜겨 패면,
다시 친일경찰이 총칼들고 달려와 보복이 뒤따르고,
다시 독립투쟁한 시민들이 집단으로 몰려가고…
이 격한 대립을 빨갱이 좌파들로 몰아
친일경찰이 교묘하게 독립운동가들과 순국선열 후손들을 재거했으니,
장택상은 부친피살 원한의 복수를 철저하게 한 것이다.
◈ 장택상,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면서 가문의 원한을 풀다.
조선의열단 단장 독립운동가 좌익 김원봉은 다른 독립애국지사들 처럼
독립이 되고 해방이 되자 고향 밀양으로 돌아왔다.
(사진) 김원봉을 잡으려고 왜경이 붙인 현상금 사진.
조병옥과 장택상은 공산당을 박멸하고
이승만에게 대권을 넘겨주려고 설치다가
한반도 통일의 금기 영역까지 넘어서 버렸다.
반공주의자인데도 이승만에 반대한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 계열 독립투사들과
중도세력 독립투사들까지 좌익(빨갱이)으로 몰아 숨도 못쉬게 탄압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만주에서 항일테러 활동과 무장독립투쟁을 벌인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장군 사건이었다.
어느 독립운동가는 이렇게 회고했다.
"엄청난 현상금을 걸고 끈질기게 추적해온 왜경이었으나
한번도 붙잡지 못했던 김원봉이다.
그런데 해방되어 돌아온 조국의 경찰에게 체포된 것이다.
이른바 좌익이라는 딱지를 붙여 독립투사들을 제거한 것 같이,
김원봉 또한 인격적 모욕과 함께 심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김원봉을 붙잡아간 사람은 그 악명 높은 친일경찰 노덕술이었다.
일제 때 종로경찰서 형사로 독립운동가들을 붙잡아 악랄한 고문을 했던
그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은,
김원봉이 거느리던 '의열단의 처단 명단'에 올라 있던 자 였다.
'김원봉을 반드시 잡아 오라'고
특명을 내린 자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었다.
하지만 노덕술이 김원봉을 묶어 장택상 앞으로 끌고 갔을 때 였다.
두둑한 보상금을 받고 일계급 특진까지 할 꿈에 부푼 노덕술은
'하이~'하며 차렷 자세를 취했다.
뜻밖에 장택상은 소리를 질렀다.
'이 바보같은 놈아~ 정중히 모셔오랬지 이렇게 불경스럽게 했나?'라며
송구스럽다는 듯 묶인 밧줄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완전히 때리고 어르고 하며 독립투사들를 갖고 노는 모습이었다.
친일경찰에게 수모를 당한 의혈단장 김원봉은
친일파가 득세하고 있는 남한을 떠나 북한으로 갈 결심을 굳힌다.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 활동을 하면서
젊은 날 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웠던
김성숙 선생도 똑 같은 수모를 당한다.
(사진) 조선의혈단원 독립투사 우익 김성숙.
좌익 김원봉과 함께 싸운 의혈단원이었다.
그는 승려 출신으로 만주로 가서 무장투쟁을 벌이면서도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등 젊은 독립투사들을 양성했다.
그런 김성숙 선생이 해방된 조국에서 미군정법을 위반했다고
간첩으로 누명을 쓰고 징역 6개월의 어이없는 옥살이를 했다.
그를 잡아가고 문초한 경찰들은 죄다 장택상이 키운 친일경찰이었다.
장택상이 수도경찰청장에 기용됐을 때
국일관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몇몇 사람이 충고를 했다.
"이제 군정의 경찰권을 장악했으니
독립투사에게도 잘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택상은 반사적으로,
"나는 그들을 봐 줄 수 없소!.
내 아버지가 독립투사들에게 죽었는데
어떻게 그들을 동정하란 말이오?"
이에 대한 장택상의 대답은 단호하고 냉정했다.
◈ 대통령이 된 이승만, 논공행상으로 장택상을 중용하다.
대한민국의 일제 청산은
이승만에 빌붙어 권력을 움켜쥔 몇몇 관료들 때문에 불가능 했던 것이다.
(사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외무부장관의 막강권력을 쥔 친일파 장택상.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쯤,
조병옥은 야당인사들과 접촉하고 있었고,
장택상은 '이승만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던
그 공을 인정받아 이승만 정권의 초대 외무부장관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1948년 5.10선거와
이 후의 두 차례 민의원 보궐선거에 계속 낙선한 것을 보면,
장택상이 국민들에게 얼마나 잘못된 인상을 심어 줬는지를 알 수 있다.
4번째 고향 칠곡에서 겨우 민의원으로 당선돼
자유당 국회부의장을 지내게 되었다.
1952년에 그가 갈망하던 권력의 정점 국무총리가 되었다.
장택상은 국무총리로 일하면서 남긴 업적은 단 하나뿐 밖에 없다.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을 위해 헌법을 뜯어 고친 '발췌 개헌안' 추진이다.
◈ 대지주의 아들 VS 소작농의 아들.
5.16혁명으로 박정희가 대권을 잡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한 사람이 장택상이였을 것이다.
두 사람 다 경북 금오산기슭의 이웃 동네에서 태어난 동향이다.
하지만 당시 두사람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두 사람집은 경부선 철길 건너 사이로 2Km 정도 떨어져 있는
구미면 상모동과
북삼면 오태동이었다.
장택상 집안은 해방 무렵까지만 해도
영남 제일의 친일 대부호 만석꾼으로
고향에서는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닐 정도로 대부호였다.
(사진) 칠곡군 북삼면 오태동(지금의 구미시), 장승원 저택, 장택상 생가.
부잣집 아들인 장택상은 어린시절부터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구치현에서 소학교를 다니고
도쿄에서 와세다 대학에 공부하다가
영국 에든버러 대학으로 가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대통령 빼고는 다 해 먹은 자로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싹을 잘라버린 권력에 빌붙은 비열한 인간이였다.
반면,
박정희 일가는 전형적인 소작인의 가난한 집안이다.
아버지는 묘지에 딸린 종중 논밭
여덟 마지기(1600평) 농사를 짓다가 도저히 생활이 안되자
장택상 집
다섯 마지기(1000평)를 더 소작하며 생계를 겨우 이어갔다.
박정희는 이집의 막내아들로서
가을 추수가 끝나면 둘째 형 무희 씨가 지게에다 도지(토지 삯)와
마름(토지 관리인)에게 줄 씨암탉을 지고
장택상 저택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자란
가난에 찌들린 소년이었다.
(사진)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지금 구미시), 박정희 생가.
이런 소작농의 막내 아들이
장택상이 평생 꿈꿔도 못해 본 대통령이 되었으니
권력만 쫒던 장택상의 심정은 어땠을까?
박정희가 집권하자
장택상은 돌연 야당투사로 돌변한다.
그에게 부귀영화를 준 일본일제에게 등을 돌려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의장으로
반 박정희 운동에 앞장선다.
사석에서도 '박정희 씨', '박정희 군'이라고
낮춰 부르며 독설을 늘어놓아,
이 얘기를 전해 들은 박정희는
화를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장택상은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칠곡-성주 자유당으로 출마했으나
공화당 송한철에게 떨어지고
출국금지 대상이 되자,
비굴한 내용의 항복 편지를 쓰고
겨우 해외로 빠져나간 장택상은
곧 숙환으로 지옥으로 갔다.
그는 지옥으로 떨어 졌지만
<한민족 독립투사 순국선열> 영정 앞에
참회도 하지않고 죽었으니
그는 뼈속까지 친일파라고 하겠다.
그보다 더 슬픈사실은
장택상이 죽은 후,
박정희 정부를 타도하며 민주투사로 탈변한,
진보와 좌익 세력들의 추앙을 받던 2사람,
대통령이 된 김영삼, 김대중이
장택상의 비서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들 두 대통령까지 장택상의 친일DNA를 물려받아,
톡립투사 후손, 순국선열 후손들을
연속으로 푸대접? 팽게쳐 버렸으니?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앞으로
그 누가 목숨바쳐 나라를 지키고
애국하려는 사람이 되려 하겠는가?
지금도 순국선열 후손들 보다
친일수구 후손들이 더 큰소리를 치고 있지 않는가??
(사진) 장택상 비서출신 두분.
정말 세상살이는 새옹지마(塞翁之馬)인가 보다.
개인의 원한으로
독립투사들의 싹을 잘라 '민족의 혼'을 말살시킨 친일정치인 장택상은
'민족의 죄인'으로 낙인 찍혀 지옥으로 떨어졌지만,
민족의 번영을 위해
빈농의 아들로 '5천년 민족의 가난'을 물리친 박정희는
'민족의 영웅'으로
우리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 5,000년 한민족 가난을 해결해 준 <민족의 영웅> 박정희.
<대한민국 순국선열 유족회> 부회장 역임.
松隱 劉秀(鍾) 拜上.
<미안합니다><고맙습니다><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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